조명환 목사

소련의 철권통치자 푸틴 대통령이 지난주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아마 그 후유증이 심해서 지금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것 같다. 

철석같이 믿었던 심복이 배신의 칼을 빼들고 모스크바로 진격해 오고 있으니 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용병 기업 바그너의 수장인 프리고진이 탱크를 앞세워 우크라이나로 향하던 총부리를 180도 회전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었다. 

충격의 반란이었다.

프리고진이란 사람이 누구인가? 

러시아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음식장사하던 사람이었다. 

음식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푸틴에게 픽업되어 그의 주방장이 되었고 푸틴이 식사할 때 살그머니 뒤에서 접근하여 빈 컵에 물을 따라주던 심복이었다. 

그런데 그가 용병들의 수장이 되어 우크라 전쟁터에 나간 것이다. 

용병들 대부분은 전쟁용으로 감방에서 풀어준 사람들이라고 하니 그 용병의 수장이었다면 인간성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전 세계는 한순간에 화들짝 놀랐다. 

모든 언론들이 브레이킹 뉴스로 이 프리고진의 회군 소식을 전하기에 숨이 가빴다. 

히틀러도 끝내 성공하지 못했던 모스크바 공략이 성공할수 있을까? 어쩌면 푸틴의 23년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려나? 숨을 죽이고 지켜봤지만 드라마는 단막극으로 종치고 말았다.

프리고진이 진격을 멈추고 인접국 벨라루스로 피신한다고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푸틴은 그 자를 그만두지 않겠다며 대대적인 숙청을 암시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세계가 꼼짝 못하는 푸틴의 통치력은 한순간에 금이 가고 말았다. 단순한 수모가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으니 세계적 수모였다. 

창피하고 쪽팔린 푸틴 대통령.

배신이란게 어디 모스크바 근처에만 있는가? 예수님 주변에도 있었다. 

첫째는 ‘수석 비서’였던 베드로였다. 

‘네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믿음을 주면서 제자로 세운 베드로였건만 스승에게 배신을 때리고 말았다. 

예수님이 가야바의 법정에 끌려왔을 때 저 양반을 전혀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였다. 

예수님은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갈릴리에서부터 끌고 다니며 먹이고 가르치며 훈련을 시켰건만 예루살렘에 와서 배신의 칼을 빼 들다니! 

아마 갈릴리 어부가 으리으리한 가야바의 법정 분위기 때문에 겁에 질렸을지도 모른다. 

우선 모른다고 오리발부터 내민 것이다.

 ‘우발적인 몸보신용 배신’이었다.

또 하나의 배신이 있다. 

이건 ‘전략적인 금융사기형 배신’이었다. 가롯 유다였다. 

아주 치밀하게 전략을 짜고 돈으로 타협을 시작한 지능적인 배신. 예수님은 돈 때문에 선생을 팔아넘긴 가롯 유다의 금융사기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배신의 결과는 어땠는가? 

베드로는 땅을 치고 자신의 배신을 후회하며 회개했다.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 시온산 기슭에는 ‘베드로 통곡교회’가 서 있다. 

베드로의 회개를 기념하는 예배당이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의 배신을 회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어찌 되었을까? 

아마 로마의 베드로 성당도 백지화되었을 것이고 역사 대대로 내려오는 교황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캐톨릭에서는 베드로를 1대 교황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베드로와 달리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란 영광스러운 명예를 돈 때문에 팔아넘기고 회개마저 포기하는 바람에 처참하고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만약 유다 역시 회개하고 비아 돌로로사를 주님과 함께 걸었더라면 아마 지금 ‘세인트 주다’로 추앙받을 것이고 유다(Judas)란 교회이름이 세상에 넘쳐날지도 모른다. 

그의 배신 드라마는 시작은 좋았지만 죽음으로 끝난 비극이 되고 말았다.

배신이 어디 예수님 주변에만 있었는가?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배신을 경험하고 나도 모르게 내 이웃을 배신하며 사는 경우마저 허다하다. 

내가 신의를 저버리는 배신을 때렸다면 우리에겐 두 가지 길이 있다. 

베드로처럼 회개하느냐? 아니면 유다처럼 깔아뭉개고 끝내 배신자로 사느냐다.

특별히 이민교회는 성도와 성도끼리, 목회자와 성도끼리 배신으로 얼룩지는 경우가 많다. 

개척교회나 작은교회 목사님들은 교인 한가정이라도 붙잡으려고 이민 올 때 공항에 가서 이민 가방 날라주고, 영어 못해 더듬대는 성도들 붙잡고 관공서 찾아다니며 문서 작성해주고, 급할 때는 없는 돈 모아서 성도들에게 돈을 꾸어 주는 경우도 있다. 

절대로 성도들과의 금전거래는 금물이라고 하지만 금방 죽게 되었는데 모른 척 지나칠 목사님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돈도 떼이고 그렇게 정성들여 보살펴 왔건만 몇 년 지나면서 큰 교회가 편리하다는 장점을 깨달은 뒤 바람처럼 사라지는 교인들을 바라볼 때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다. 

법을 들이대서 해결될 수 없는 그 배신감 때문에 흐르는 것은 눈물 뿐이다. 

그래서 ‘이민목회는 눈물의 목회’다.

프리고진이란 사람처럼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이란 밥 먹듯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공동체에서 배신은 우리 가슴속에 내주하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길과 유다의 길 중에서 어느 길이 주님이 기뻐하실 길인지를 분별하며 살아가자.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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