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사회와 신앙 4


탁영철-01.jpg

탁영철 목사
<제자들교회>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폭력이 나타납니다.
그 모양과 양태만 다를 뿐 약자는 항상 희생양이 되어 강자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그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합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강자는 폭력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원하는 것을 성취합니다. 이러한 폭력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지고 강도가 짙어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희생자가 겪는 고통의 정도가 점점 더 강화되고 그 대상자 역시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폭력은 반드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약자도 많아지면 강해지고 강자도 줄어들면 약해진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디지털 사회가 주도하는 세계화 흐름 속에서 개인의 신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먼저 구조적인 악을 분별하기 위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도덕성은 개인의 도덕성에 비하여 저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악행을 집단적으로는 쉽게 자행합니다. 옳은 말을 하는 것과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회가 구조적으로 악한 상태에서 옳은 말을 하기는 쉽지만 옳은 사람으로 존재하며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구조적인 한계가 개인의 가능성을 한정짓고 개인의 힘으로는 그것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가 구조적으로 악하면 구성원들이 그것을 악으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행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고 옳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옳게 행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눈은 신앙적인 관점과 기독교적 지식에 의하여 형성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정신적 재산 즉 지적 재산 형성을 위한 저수지가 되어야 합니다.
물리력의 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없으며, 행복과 만족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원천이 물질적 재산보다는 정신적 재산이 되어야 합니다. 정신적 재산은 약자와 가난한 자도 소유할 수 있으며 서로를 위하여 아무리 사용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즉 나눌수록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풍성하게 됩니다. 설령 강자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식을 이용한다 할지라도 지식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위협이 됩니다.
앎과 깨달음은 변화와 성숙을 일으키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으며 함께 행복하기 위한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을 통해 존재의 출발점과 이유 그리고 종착점을 깨닫는다면 순간이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은 깨달음의 원천입니다.
셋째로 시대적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강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요즈음 세대는 너무 나약합니다. 먹고살기에만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면 쾌락이나 편안함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피하기에만 급급하고 그것이 주는 유익은 모릅니다. 시련도 극복하기만 하면 오히려 좋은 것입니다.
그것에 제한되거나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과정에서 오히려 강해지고 성장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시대적 소명을 깨달으면 나약함과 게으름이 해결됩니다.
현실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어려움도 즐길 줄 압니다. 당연히 치러야할 대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냥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완수해야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게 하셨다는 소명의식은 자신의 연약함을 이기고 진정한 강자가 되게 합니다.
크리스천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볼 줄 아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멀리 보지 못하는 것은 아예 보지 못하는 것보다 위험합니다.
자신이 본 것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넓게 보면 앞을 못 보는 장님이나 시력이 멀쩡한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기획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