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 목사

 

가든그로브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가 마지막으로 예배 본지가 지난 6월로 10주년을 맞았다. 

2013년 6월 30일, 그 이름도 유명했던 수정교회는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캐톨릭교회 오렌지카운티 교구에게 팔리고 말았다.

수정교회는 한국사는 목사님들이 LA를 방문하면 의례히 찾아가는 교회순례 코스였다. 

1980년에 완공된 거대한 예배당으로 인해 남가주가 아니라 한때 미국 개신교의 심볼처럼 각광을 받은 적이 있다. 

더구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이끄는 교회 예배시간은 ‘능력의 시간(Hour of Power)’이란 이름으로 TV를 타고 전국에 중계되었다.

그래서 로버트 슐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 바람에 수정교회의 명성도 하늘만큼 치솟았다. 

이 건물은 외벽을 1만 장이 넘는 대형 유리를 이어 붙여서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건물 전체가 반짝이는 수정을 연상시킨다 해서 크리스탈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신비로운 이 건물을 구경하러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슐러 목사님 목회철학은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말로 요약되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신념은 바로 적극적 사고의 기본이며, 그 긍정적 사고는 바로 하나님께로 부터 비롯된다고 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꿈을 가져라, 그리고 곧 시작하라!”고 외친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별세하면서 교인들은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고 운영을 견디다 못해 파산신청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캐톨릭교회에게 팔려 지금은 크라이스트 캐시드럴이란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수정교회와 로버트 슐러 시대도 한 때였다. 

지금은 그 명성과 명예가 모두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어디 한번 떴다 사라지는 게 수정교회의 명성뿐인가? 

시카고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에벨스 목사님도 마찬가지다. 

구도자에게 초점을 두고 하는 목회, 그래서 순식간에 성장하는 그 교회에서 뭔가를 벤치마킹 하겠다고 목사란 목사는 다 시카고로 몰려가는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구도자란 뜻의 ‘Seeker’란 말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빌 하이벨스도 한때 였다. 교인과의 14년간 부적절한 관계가 탄로나면서 그의 명성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지난해 은퇴한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크리스차니티 투데이가 뽑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로 선정되기도 했고 그의 저서 ‘목적이 이끄는 삶’은 전 세계적으로 3천만부 이상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은퇴와 더불어 목적이 이끄는 삶도 시들해 지고 있는 것 같다.

호주 시드니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로 불같이 뻗어나가던 오순절 계통의 ‘힐송처치’도 물질적 풍부를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는 번영신학의 대표적인 교회로 비판받다가 결국은 설립자 겸 글로벌 담임목사의 부적절한 처신이 알려지면서 힐송의 명예도 상처를 받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명성과 갈채가 사실은 한때라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지금은 어디 몰려가는 곳이 없어졌다. 

그냥 성경과 찬송가 붙들고 각개전투(?)에 충실하라는 암시인가?

지난 주 나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공연을 보고 왔다. 

할리웃 볼에서 열렸다. 

한마디로 한국사람 판이었다. 

그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나도 감동에 젖어 들었다. 

사실은 야외음악당 맨 꼭대기에서 그의 정교하고 섬세한 피아노 연주가 기막히게 전달이 되겠는가? 

내 귀의 달팽이관이 특수구조로 창조되지 않은 이상 그냥 저게 피아노 소리려니 하고 듣고 나왔다.

한인사회 음악계 고참에게 임윤찬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대단히 감동적이었다고 먼저 운을 뗐다. 

그랬더니 “목사님도 냄비예요. 한국 사람들 냄비 근성은 참 대단해요!” 

아니 나보고 냄비라고? 어째서요? 

그분 왈 “임윤찬은 천재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러나 그런 수준의 천재는 많이 있어요. 몇 년전 조성진이 어디서 상을 탔다 하니까 조성진 최고라고 난리를 피우더니 지금은 조성진이 누구? 그러잖아요. 임윤찬이 상 받았다 하니까 또 동창회다 교회선교회다 보따리 싸가지고 와서 피크닉하고 난리 피우던데 한국 사람들 냄비근성 못 말려요. 임윤찬? 조금 지나보세요? 그게 누군데? 그럴 겁니다. 꾸준하게 사랑하고 성원하는 모습이 중요한 겁니다.”

날 보고 냄비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긴 했지만 사람들이 빨리 끓어오르고 빨리 식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냄비근성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다 느꼈다. 

그저 덩달아 달려드는 쏠림현상과 지속성 부재는 우리들의 믿음 생활 가운데도 흔하게 나타나는 부끄러운 현상이니까.

그러고보면 ‘긍정적 사고방식’을 비롯하여 빌 하이벨스, 힐송처치, ‘목적이 이끄는 삶’도 어쩌면 냄비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옆에서 달려가니까 정신없이 덩달아 뒤따라가는 쏠림현상.

냄비 말고 부엌에는 솥뚜껑이 있다. 

지금이야 전기밥솥시대니까 솥뚜껑이 있을리 없지만 옛날 무쇠로 만든 시커먼 솥뚜껑은 ‘부엌의 왕자’였다. 

냄비는 삽시간에 끓지만 솥뚜껑은 오래 기다린다. 

쌀이 끓어올라도 그걸 견제하면서 밥이 될 때를 기다려주는 중후하고 한결같은 무게감!

한번 돌아보기로 하자. 

나는 냄비 신앙인가? 혹은 솥뚜껑 신앙인가?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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