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 목사

 

종교개혁 하면 우선은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 등을 떠 올린다. 

그러나 우리가 떠올리는 이들 종교개혁 고참들보다 ‘대고참’이 또 있다. 바로 영국의 존 위클리프다. 

위클리프는 루터보다 약 150여년 앞선 사람이다. 

그래서 보헤미아의 얀 후스, 네델란드의 에라스무스와 함께 이들 세명을 ‘종교개혁의 3대 선구자’라고 부른다.

사실은 루터나 칼빈과 같은 거목의 그늘 아래 가려져 있긴 했지만 위클리프는 참으로 대단한 선구자였다. 

그는 옥스퍼드대학을 나오고 거기서 가르치던 신학자였다. 

우선은 교황청의 파워가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에 위클리프가 주장하고 나온 청천벽력같은 주장이 무었이었는가? 바로 화체설(化體說) 부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식 성찬 교리는 화체설이었다.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들고 축성하는 순간 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해석이었다. 

이 화체설에 반기를 든 겁 없는 사람이 위클리프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성례전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성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상징적 표시라고 일갈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주장이었다. 

떡과 포도주가 되는 본질요소인 실체가 없어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모양과 맛, 냄새, 색깔이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그는 사제가 떡을 뗄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신성모독죄라고 주장했다.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떡과 포도주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기념하는 사건이라 하여 '기념설'을 주장했다. 루터가 '공재설', 칼빈이 '영적임재설'을 주장했지만 모두 화체설에 대한 위클리프의 반발에서 비롯된 주장들이었다.

그런 위클리프가 교황청의 면제부 판매를 보고만 있었을까? 

아니다. 세상의 권력을 거머쥐고, 부에 혈안이 된 교황은 아마도 선택된 자가 아니라 적그리스도라고 까지 혹평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청빈한 설교자들'이란 뜻의 '롤라드파(Rollards)'란 선교단이었다. 

사도적 청빈을 생활 모토로 삼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지팡이만 짚고 둘씩 짝지어 다녔다. 

이들은 화체설, 면죄부, 성직자 독신제 등을 비판하고, 교황제도를 비성경적이라고 규탄했다.

그건 “아주 내 목숨 가져가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란 별명과 함께 종교개혁의 여명을 밝히고 사라졌지만 죽은 후에도 화가 풀리지 않은 캐톨릭교회는 그의 시체를 파내어 부관참시하기도 했다.

그의 죄목가운데 큰 거 하나가 성경번역이었다. 

중세 1000년의 암흑시대 주역은 당시의 캐톨릭교회였다. 그들은 우선 성경을 금지시켰다. 

물론 인쇄술이 개발되지 않았기에 필사본 성경은 구하기도 어려운 시대이기도 했다. 

다만 성경은 소수 캐톨릭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때 성경을 번역하여 사제뿐 아니라 평신도의 손에 쥐어 주겠다는 기발한 생각에 이른 것이 위클리프였다. 

그가 내건 슬로건이 이것이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소리? 맞다. 링컨이 한 말이 아니던가? 

사실은 위클리프가 오리지날이고 링컨은 위클리프의 말을 모방한 것이다.

성경이 번역되어 사람들 품에 안기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경번역을 시작한 위클리프는 당시 공식 성경인 라틴 성경, 즉 성경원문을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클리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기도 했다.

그가 고난을 각오하고 성경번역에 뛰어든 이유는 로마카톨릭의 가르침과 성경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은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모든 저서를 금서로 선포했다. 

그가 중풍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화가 풀리지 않은 교황은 콘스탄스 공회를 열어 위클리프의 성경을 이단으로 선포하고 이미 죽은지 44년이 지난 위클리프의 유골을 무덤에서 캐내어 불사를 것을 결의했다.

거룩한 땅에 그를 묻어서는 안된다는 교황청의 주장에 따라 유골을 태운 재는 강에 버려졌고 바다로 흘러 흘러 넓은 세상으로 흩어졌다. 

마치 그의 개혁 사상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모습과 비슷했다.

위클리프 성경이 원어인 히브리어나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에서 번역되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성경 번역 작업의 사상적 토대는 후대에 이어져 틴데일 성경, 매튜 성경, 크롬웰 성경, 그리고 킹 제임스 성경 탄생에 기여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는 전 세계 50여개 지부를 두고 성경번역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성경이 대중에게 다가갔을 때 역사가 변했다. 

제롬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을 때, 위클리프는 영어로, 루터는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 역사가 변화되지 않았는가?

오는 대강절 둘째주일은 세계의 모든교회들이 성서주일(Bible Sunday)로 지키는 날이다. 

성경을 가질수도 없었고 갖고 있으면 벌을 받아야 했던 역사가 엄연하게 존재했었다. 

더구나 성경을 번역하다 부관참시를 당한 위클리프를 생각하면 우리가 손에 쥔 성경이 기적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무시무시한 고난의 역사를 거쳐 내 손에 들어온 성경, 대충 넘어가지 말고 진정성있게 감사하며 넘어가야 할 성서주일.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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