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한가운데서 한국교회는 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 

그때 읽었던 어윈 W 루처 목사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라는 책이 참 인상적이었다. 

루처는 이 책에서 독일 교회가 나치의 회유·압박에 힘없이 침묵하고 타협으로 일관하다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역사의 근거를 들면서 미국 교회도 이러한 위험성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와 교인은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교회는 정부 시책이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 

물론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이라면 마땅히 대항해야 하지 않겠는가. 

답은 간단한데 실제로 합당성과 타당성을 정확히 나누는 기준이 모호한 것이 문제다. 

마태복음 22장 15~22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세금에 대한 문제로 시비를 거는 장면이 나온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금 낼 돈을 가져오라 명령하시고는, 동전에 새겨진 글과 얼굴이 누구의 것이냐고 되물으신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쾌하게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모든 것이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하늘나라 시민이다. 

두 나라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중 국적의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 

더 심각한 것은 정치와 이념이 양극으로 치닫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한 달 사이에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표와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이 정치 테러를 당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정치적 신념으로 인해 상대방을 증오하거나 상대방을 악마화해 제거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총선이 다가오면서 교회와 교인들은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당신들은 누구 편인가.'

편가르기를 강요하며 우리를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편협함이다. 

'편협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교회 안에서도 흔히 서로의 '마음을 맞추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한 사람의 리더를 중심으로 마음을 낮추려는 시도들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이단의 교주들을 양산해 냈고, 동일한 신앙 패턴을 만들려는 노력들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압제하는 율법주의적 공동체를 만들어 왔다. 

이러한 극단적인 시도들이 외적인 성장과 단합된 공동체를 만들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를 만든 것은 아니다.

총선을 앞두고 '팬덤정치' '혐오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모든 정당은 같은 편의 마음을 모아 세를 집결하고 표를 모아 당선을 위해 달려갈 뿐이다. 

'다른' 소리를 내면 '틀렸다'고 규정한다.

같은 소리만 내는 같은 편을 만들면 선하고 옳은 것인가. 

역사를 통해 우리는 온 국민의 마음을 모아 '나치즘'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무서움을 경험했다.

조금 위험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민주주의 역시 그러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다수의 편에 서는 것만이 '옳음' 혹은 '진리'라고 착각하며 다른 사람을 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옳음이란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갈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우리가 이 땅에서 누구 편에 서야 옳은 것인가. 

같은 편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일지라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한 표를 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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