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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이로 아흔둘, 박재훈(캐나다 토론토 큰빛장로교회 원로) 목사의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박 목사는 지난해 초연한 ‘오페라 손양원’에 아리아 2곡과 합창 1곡을 추가하는 등 수정 보완을 거쳐 오는 31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린다.


고려오페라단(단장 이기균)이 공연하는 ‘오페라 손양원’은 제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 4작품 중 하나로 선정돼 초대를 받았다.


◇‘오페라 손양원’ 끝까지 다듬고 고친다=초연 때와 달라진 점은 크게 세 가지.


손 목사가 두 아들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과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회개하는 장면, 동네 사람들이 한센인을 돌보는 손 목사에게 합창으로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장면 등이다.


갑상선암과 전립선암으로 10년 가까이 투병중이고 협심증과 당뇨합병증까지 앓고 있는 그의 창작의지와 열정은 놀라움 그 자체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은혜로 돌렸다.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는 거지요. 시키시는 분이 계시니까 창작을 하는 거지, 그냥은 누가 하라고 해도 절대 못해요. 이번 공연 후에도 좋은 의견이 나오면 또 고쳐야죠.
할 수 있는 한 계속 다듬고 고칠 생각이에요”


‘오페라 손양원’은 혹독한 산고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2004년 여수 애양원에서 손 목사가 한센인의 발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내는 사진을 보고 눈물로 엎드려 기도한 뒤 창작을 결심했지만 대사를 구하지 못했다.


2년 정도 애를 쓰다가 “애를 써서 만드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모두 찢어버렸다.
기독공보 편집장을 지낸 김희보 목사가 대사를 맡으면서 비로소 일이 풀려나갔다.
실제 작곡에 들어간 것은 2009년부터다.


지난해 초연한 작품의 반응은 뜨거웠다.


4회 공연 전석이 매진됐을 뿐 아니라 비기독인 등 다양한 관객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박 목사가 ‘오페라 손양원’에 갖는 애정은 각별하다.


“하나님께서 한국 땅에 교회를 많이 허락해주셔서 오늘 같은 번영을 이뤘지요.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는 몇몇 잘못된 사람들 때문에 지탄을 받고 있어요.
손 목사님 같은 정신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늘어나면 우리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 수 있어요”

 


◇광복후 3일만에 동요 25곡 작곡=박 목사는 동요와 찬송가, 오페라에서 굵은 족적을 남긴 한국음악계의 거장이다.


1922년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난 그는 평안남도 강서군의 초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광복을 맞이했다.


“개학은 코앞인데 학생들에게 가르칠 노래가 없었어요.
일제시대 때 초등학생들이 흥얼거리던 노래는 일본군가가 대부분이었단 말이에요.
안되겠다 싶어서 직접 노래를 만들기로 했지요”


개학 전에 한글로 된 우리 동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가사부터 물색했다.


수소문 끝에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발행하다 1944년 폐간된 월간지 ‘아희생활’ 100권을 보관하고 있던 분을 찾아가 50권을 빌렸다.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단 3일간 50편의 동시를 골라서 곡을 붙였다.


며칠 뒤 가사는 다른데 곡은 비슷한 노래들을 가려내고 25곡을 추렸다.


“그때 만든 노래가 ‘시냇물은 졸졸졸졸’ ‘눈꽃송이’ ‘산골짝의 다람쥐’ 등이에요.
어떻게 3일 만에 50곡을 만들었는지 저도 궁금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박 목사는 이듬해 소련군 치하의 압제를 피해 월남을 결심하고 부활절 아침 38선을 넘었다.
남쪽에도 동요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주일 동안 등사기를 밀어서 악보집 500부를 만들어 서울 명동의 국제음악사에 갖다줬는데 이틀 만에 동이 났다.


이후 그가 작곡한 동요는 ‘어머님 은혜’ ‘봄’ 등 모두 1000여곡.


식민지배와 전쟁, 가난으로 웃음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그의 노래는 산타클로스의 선물과 같았다.


우리말로 된 찬송가가 거의 없던 시절, 찬송가 작곡에도 나섰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산마다 불이 탄다’ 등 500여곡의 찬송가를 작곡했다.


◇필생의 숙제는 ‘오페라 3·1운동’=한양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던 1970년 첫 오페라 ‘에스더’를 완성했다.


이 무렵 마삼락 선교사와 나눈 대화가 또다른 전환점이 됐다.


한국장로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아들인 마 선교사는 그에게 다음 작품에 대해 물었다.


“토마스 선교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구상중이라 했더니, 마 선교사가 정색을 하면서 한국 교회가 주도한 ‘3·1운동’부터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대작일 수밖에 없는 ‘3·1운동’을 오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음악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197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대사를 구하지 못해 작업이 공전하는 사이, 캐나다로 이주했고 목회자가 됐다.
이후 ‘오페라 유관순’과 ‘손양원’을 완성했지만 ‘오페라 3·1운동’에 대한 마음의 빚은 여전히 남아있다.


“대사만 있었다면 ‘오페라 3·1운동’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제가 못한다면 후학들이라도 꼭 ‘3·1운동’을 작품화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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