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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뉴욕 퀸즈 YWCA 홍인숙 고문총무

평생 미혼으로 살았지만 그녀에겐 ‘자녀’들이 참 많다.
 한때는 그들 덕분에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적도 있었다. 
문제아들이 대부분이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상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랬던 자녀들이 지금은 목사, 법조인, 회사원 등으로 잘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죽으면 장례식을 치러주겠다고 합니다. 
내 핏줄은 이 땅에 못 남겼지만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우리 아이들과의 인연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미국 뉴욕 퀸즈YWCA 홍인숙(70·플러싱제일교회 장로) 고문총무는 먼 이국땅에서 만난 ‘특별한 가족’ 이야기를 공개했다. 
그녀는 뉴욕에서 외롭고 힘겨운 이민자들을 위해 30년간 봉사의 삶을 살았다. 
이민자들의 든든한 안식처인 뉴욕 퀸즈YWCA를 창립해 오로지 열정과 헌신으로 그들을 보살폈다. 
특히 인종차별, 집단 괴롭힘 등에 힘겨워하는 이민자 자녀들은 그녀가 관심을 갖고 보살핀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묶인 한 가족이다. 
지난 2일 서울 명동 한국YWCA회관에서 방한 중인 홍 총무를 만났다.

독신, 하나님의 계획

그는 중학생 때부터 이미 봉사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대부속중학교 시절 양로원 봉사를 다녀온 뒤 소외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육원 봉사를 다녀온 후에는 소외 아이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연세대 재학 중엔 기독학생회 활동을 했다. 
농촌봉사활동을 다니며 농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그녀의 관심은 평생 마이너리티를 위한 삶을 살겠다는 거였다. 
이를 위해 일찌감치 결혼에 대한 생각도 접었다.
“보육원 봉사를 하면서 불합리한 것들을 보게 됐어요. 
원장 자녀들은 교복을 입고 쌀밥을 먹는데, 원생들은 교복은커녕 후줄근한 옷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있더라고요. 
내가 그들을 돌봐야 하는데, 만약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나 역시 뜻한 바대로 못할 것 같았습니다. 
새벽 2∼3시까지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힘들 테고요. 
독신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예기치 않던 Y와의 인연

그가 YWCA와 인연을 맺은 건 1967년. 
당시 Y는 대표적인 여성사회단체였다. 성적이 우수하고 사회봉사에 관심이 많던 그녀를 지도교수가 적극 추천했고,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Y에서 지역활동부 간사로 일하게 됐다.
그 시절 날마다 보따리를 싸들고 22군데를 돌아다녔다. 
수색, 수유리 등 변두리 지역의 여공, 버스안내양, 윤락여성, 주부들을 상대로 교양 및 여성의 권리 등을 가르쳤다. 
Y에서 4년8개월 동안 주로 현장에서 실무를 감당하면서 소외된 사람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게 됐다. 
그러나 한 달에 20일 이상을 현장에서 일하면서 심신이 지쳤다. 
잠시라도 쉬고 싶었다. 70년 사표를 내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 절차를 밟는 동안 대한Y의 박순양 총무가 위기에 처한 대구Y를 도와달라고 했어요. 
인생의 멘토였던 총무님의 부름을 거절 못하고 대구Y에서 두 달 동안 일했고 다시 대전Y 총무로 10개월을 더 일하다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땐 그것으로 Y와의 인연이 끝난 줄 알았어요.”
미국에서 홍 총무는 임상병리학 공부를 하고 병원에 취직했다. 
높은 보수,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즐기며 안주했다.
“4년이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회의 차 미국에 온 박 총무가 저를 보고 무심히 한마디 던졌습니다. 
‘공부 마치고 돌아와 좀더 큰 뜻을 가지고 일할 줄 알았다.’ 
순간 한대 얻어맞은 듯했어요. 
보육원을 운영하거나 평생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던 젊은 시절이 떠올랐던 겁니다.”
가깝게 지냈던 친구 서희전 권사 역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잊지 말라고 권면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드류신학대학원에서 신학도 공부했다. 
78년 졸업을 앞두고 박 총무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무엇을 했으면 좋겠습니까.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사회가 심각합니다. 
우리가 미국을 너무 모르고 왔기 때문에 여기 Y 같은 곳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박 총무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국에는 일할 사람이 많다. 
Y에서 훈련받은 사람은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봉사를 해야 한다. 
거기서 Y를 하도록 하라.’
또 다시 스스로 Y에 들어가게 됐다. 
“제가 지나온 모습을 보면 정말 제가 선택한 게 하나도 없어요. 결국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의 예비하심 속에 흘러왔습니다.”

빈 손으로 퀸즈YWCA 설립

78년 한 이민가정에 작은 화재가 났다. 
12세 미만 아이들을 혼자 집에 둘 경우 법적으로 처벌받는 미국 사회에서 맞벌이 부모가 위법을 저질렀다. 
다행히 아이들은 무사했지만 이 사건 후 Y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여 탁아소, 방과후학교를 운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해 5월 6일, 9명이 모여 뉴욕 퀸즈YWCA를 설립했다. 
그가 총무를 맡고 김명자씨를 회장으로 세웠다. 
플러싱 유니언가에 위치한 한국의료원 지하실에서 간사 1명과 업무를 시작했다. 
서 권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숙식을 책임지고 어려울 때마다 도와줬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8)란 말씀을 붙잡고 각오를 다졌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어린이 방과후학교였다. 
신문에 소개되자 문의전화가 빗발쳤지만 정작 친구 아들 하나만 왔다.
 “이민자 부모들은 아이가 몇 블록을 걸어서 다니는 것을 위험하게 여겼어요. 
직접 자동차로 데리러 다녔어요. 
그랬더니 정원이 금세 넘쳤어요. 
아이들에게 영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쳤어요. 
학교에서 영어를 잘 못해 놀림받던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됐지요.”
방과후학교를 하면서 노인 문제가 보였다. 
미국생활이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노인들이 하소연했다. 
토요일만이라도 노인들을 해방시키고자 노인 사역을 시작했다. 

또 새벽에 길거리를 방황하는 중·고생을 위해 청소년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사역은 어린이 방과후학교, 노인들을 위한 노인대학 늘푸른대학 늘푸른합창단, 2세를 위한 한국학교, 주부들을 위한 교양 프로그램, 생활상담, 복지상담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확대됐다.
80년대 이후 비행 청소년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교포 자녀 중에 갱단에서 활동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밤 11시, 12시에 퇴근하는 아이들의 부모를 만나 상담했다. 
상담은 아이들에게로 이어졌다.

“상담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자 아이들이 속내를 털어놓았어요. 
아이들이 찾아오면 붙들고 기도하고 사정해 갱단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갱단에서 나오기 위해 아이들은 오랫동안 숨어 지내기도 했어요. 
그 아이들 하나 하나가 너무 소중한 제 자식들입니다.”

오랜만에 찾아와 어렵게 일해서 번 500달러를 회관 건축 기금으로 내놓는 아이, 대학 졸업 후 취직해 어머니날에 찾아오거나 꽃을 보내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홍 총무에게 장례식을 치러주겠다, 
지켜주겠다고 말했다. 
비록 농촌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사랑이 전달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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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커뮤니티를 위한 지역봉사센터

홍 총무는 퀸즈Y의 성과를 인정받아 많은 상을 받았다. 
87, 93년 뉴욕시장 표창을 비롯해 대한민국 국민포상, 뉴욕봉사단체연합회상, 아시아청소년연맹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2010년 한인봉사센터의 봉사상을 마지막으로 2011년부터는 상을 고사하고 있다.
회관을 짓기까지 퀸즈Y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임대한 건물에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나기도 하고, 차고를 사무실로 빌려 쓰기도 했다.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건물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처음으로 모금 만찬을 열어 87년 부지를 구입했지요. 
꾸준히 모금해 대출 없이 회관까지 지을 수 있었어요.”
93년 회관이 생기자 한인 대상 활동에서 전체 커뮤니티로까지 사역을 넓혔다. 
청소년 직업, 교육, 아동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 및 오락, 주부와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 그리고 가정간호 서비스 등을 전개하고 있다. 

Y는 어린이로부터 노인, 가정 특히 여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한 첫 여성 기관이며 기독교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때부터 홍 총무는 북한돕기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93년 9월 미국과 북한 간 전화선 개설을 촉구하는 핫라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2월에는 정명훈 정명화 신영옥씨 등의 재능 기부로 ‘북한 어린이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 총 11만4500달러를 유니세프에 전달했다. 

이민자들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으므로 이제 북한동포를 품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Y가 모든 것을 갖추자 홍 총무는 이민 1.5세에게 총무직을 넘겼다. 당시 55세로 모두 그의 은퇴를 만류했지만 현재 북한아동 돕기를 모색하며 봉사활동만 하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감사한 일 세 가지를 묻자 한참을 생각하던 홍 총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처음 Y는 내 뜻이 아니었지만 Y일을 하게 된 것, Y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좋은 친구가 많은 것,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신 것이에요.”

평생을 봉사의 삶을 살아온 홍 총무는 기도 제목도 남달랐다.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루고 교회들이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크리스천도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개개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한다. 
또 Y가 본이 되는 기독여성단체가 되기를 바랐다. 비록 은퇴는 했지만 그는 뼛속까지 Y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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