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대령, 목사직분 명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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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도 자식도 없는 이오봉 할머니는 목사 부부의 지속적인 전도로 2년 전부터 교회에 나오나 최근 세례를 받았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다 귀가하는 이할머니를 목사 부부가 배웅하고 있다.

 

‘천년의 빛’의 도시 전남 영광.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염산면에 다다르니 드넓은 염전과 잘 정돈된 네모반듯한 논과 밭이 펼쳐진다. 동행하던 월평교회 박시헌(56) 목사는 그래서 염산면이 빛과 소금의 고장이라고 소개한다.
10분쯤 달려 바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소리섬 ‘가음도’에 들어섰다. 불과 6년 전만 해도 섬이었으나 현재는 둑을 놓아 육지와 연결됐다.
갈대숲을 지나자 멀찌감치 가음산 자락에 자리잡은 작은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연식 16년차인 승용차가 헐떡이며 오르막길을 오른다.
“차가 오래돼 경사로를 오르려면 힘이 달려요. 힘껏 운전하지 않으면 오를 수가 없답니다.”
박 목사가 겸연쩍은 듯 한마디한다. 페인트로 새단장했지만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 없는 오래된 시골교회와 낡은 사택. 박 목사 부부가 인생 2막을 시작한 곳이다.

빛과 소금의 고장 월평마을
“이곳은 서울과 달라 도움을 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아요. 서울에는 도움이 되는 일꾼이 많은데 이곳은 일꾼은 없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젊은이들은 다 서울로 가버렸거든요.”
박 목사가 사역지로 이곳을 선택한 이유다. 박 목사는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37년간 군생활을 하다 3년 전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군인으로 살던 37년간 36번 이사하며 시골근무를 많이 했다. 전후방을 막론하고 교회가 없는 곳이 많아 늘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
“사역지로 사방 4㎞ 범위 내에 교회가 없는 지역을 찾았어요. 염산면에 12개 교회가 있는데 그중 월평교회는 제가 찾는 조건에 맞았어요. 바다가 있는 농어촌을 돕는 소명을 갖고 사역지를 결정했어요.”
박 목사나 서연이(54) 사모에게 전혀 연고가 없는 곳이었다. 부부는 서울 태생이고 서울에서 자랐다. 가장 오지에 가서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 힘든 자, 어려운 사람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농촌으로 왔다.
이는 또 7년 전 야간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50살까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면 50 이후로는 평생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고 했던 서원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경찰관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박 목사도 이사를 많이 다녔다. 그 시절 경찰서 옆에는 꼭 교회가 있었다. 교회 다니던 어른이 손을 꼭 잡고 데리고 다녔다. 군에서도 군인교회에서 남선교회장 여선교회장을 하며 목회를 준비했다.
예편하기 직전에는 4년간 경기도 고양시 거룩한빛광성교회를 다니며 남선교회장 찬양대장 베트남선교회장으로 봉사했다. 6년 동안 일대일 제자양육 멘토로 헌신하기도 했다.
박 목사가 목회를 한다고 했을 때 아내가 더 좋아했다. 아내는 절에 다녔으나 하나님을 만나고 완전히 돌아서서 남편보다 더 믿음이 좋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 계속 새벽기도를 다니며 남편을 위해 항상 기도했다. 아내도 올해까지 3년간 신학공부를 했다.
준비를 마칠 때 즈음 빛과 소금이 있는 고장으로 가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음성을 들었다. 예편식이 끝나자마자 월평마을로 들어왔다.

섬김과 나눔에 초점 맞추다
농촌에는 어르신들만 있는 줄 알았다. 몇 년 새 농촌에 다문화가정이 많아지면서 젊은이들의 빈자리를 채웠다. 10∼20세 차이 나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들의 생활은 고단했다.
남편들의 폭력 등으로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 사모는 필리핀 몽골 베트남 중국 등에서 온 20대 젊은 새댁들의 친정엄마가 돼 주었다.
한글을 가르치며 출산을 돕고 육아, 요리, 설거지부터 살림도 하나하나 가르쳤다. 서 사모의 섬김과 박 목사의 기도 덕택에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다문화가정에서 40여명이 교회에 출석한다.
“이주여성 한 명을 전도하기 위해 남편, 시댁식구, 그들이 일하는 하우스의 주인까지 챙겨야 해요. 잘못하는 남편은 부부교육, 부모교육을 통해 가정을 치유하고 회복시켰어요.”
월평마을에는 40명의 어르신이 계신다. 독거노인도 다수 있다. 어르신들은 처음에는 서울에서 온 목사 부부가 1, 2년 있다 떠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냉담했다. 박 목사가 헌금을 마을회관에 기부하고 생일잔치를 열어주며, 아프거나 힘들 때 도와주자 하나 둘 마음 문을 열었다.
이제는 주민 전체가 말씀을 사모하는 눈빛으로 변했고 목사 부부를 좋아한다.
“어르신들의 거부반응이 대단했지만 날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다가가니 50%는 교회에 나오세요. 주민들끼리 미워하지만 않으면 다 나오실 분위기예요.”
농사를 지으며 생긴 구원(舊怨) 때문에 주민들끼리 상처가 깊었다. 논물대기로 다퉜거나 농산물 납품 가격으로 인한 마찰 등이 원인이었다. 교회에서는 이들을 화해시키고 함께 예수님을 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박 목사는 학생들의 학습의욕 고취도 교회의 목표라고 말했다. 농촌에선 학생들의 공부 포기가 큰 문제였다.
부모들은 공부를 해도 소용없다며 자식들을 염전이나 논밭에서 일을 시켜 돈벌게 할 생각만 했다. 학생 20명가량을 모아 전 과목을 가르쳤다.
생전 처음 100점을 맞는 아이들이 나왔다. 처음 학교에서는 커닝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또 100점을 맞고 “월평교회에서 공부를 한다”고 하니 야간자율학습에서도 빼주고 교회에서 공부하라고 했다.
지금은 스승의 날에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라고 선생님들이 일러줄 정도다.
“부모들은 여전히 못마땅해 하세요. 괜히 헛바람 넣지 말라고. 그러나 시골 학생들이 가난을 벗어나려면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학생들을 도와주고 비전을 가질 수 있게 할 겁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8명으로 출발한 월평교회 성도가 60여명이 되면서 예배드리기가 힘들어졌다.
창고를 개조해 만든 유초등부의 주일학교 공간은 방문을 열자 냉기가 싸하게 밀려나온다. 교육관이 필요해졌다.
낡은 사택에는 지네가 개미만큼 많다. 질겁하던 사모는 이제 지네와 친해졌다며 웃는다.
염산면에 흩어져 살고 있는 다문화가정 성도들을 매주 차로 픽업해오다 보니 다수의 동역자와 크고 힘센 밴이나 버스가 아쉽다.
다행히 2년 전부터는 우체국장 김희경(52) 집사가 힘이 돼주고 있다.
최근 김 집사의 권면으로 우체국 직원도 주일날 차량운행을 돕고 있지만 40여명을 픽업하기가 쉽지 않다.
“이곳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곳이었어요. 폐쇄될 위기에 처한 교회를 저희가 살린 거지요. 난방이 안 되고 바닥에 돗자리를 펴 식사를 하며 교육관의 필요성을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준비해야 한다며 일어선 박 목사는 “크고 작은 게 문제가 아니라 천국과 같은 분위기만 만들면 된다”며 “이것이 소박하면서도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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