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배씨의 2013년 희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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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향동 스마일' 김상배씨가 밝게 웃는 모습으로 동네 골목을 힘차게 걸어 내려오고 있다.


김상배(52)씨의 집은 버스 종점에 있다.
신림동과 난곡동을 오가는 서울 지선버스(5522번) 종점 바로 뒤편 다세대주택 반지하 2칸짜리 월세방이 다섯 식구의 보금자리다.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 6일 만난 김씨는 먼저 손을 내밀며 환한 웃음으로 악수를 청했다.
왜소한 체구의 그가 걸치고 있는 낡은 점퍼가 조금 커 보였다.
며칠 전 동네 사람한테서 얻은 거라고 했다.
웃을 때마다 위아래로 삐뚤빼뚤 솟아난 덧니에 눈길이 자꾸 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없는 50대 초반의 이 남자는 10년 넘게 살아온 동네에서 ‘난향동 스마일’로 통한다.
폐지·고물을 주우며, 때로는 재활용품 수거 일을 거들면서 동네 골목과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먼저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스타일이다.
동네에서 만난 한 주민은 “김씨는 정말 성격이 밝고 잘 웃고 친절한 사람”이라며 “그가 사는 형편을 보면 매치가 잘 안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경남 거창 시골 출신인 그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 몸으로 때우는 일을 주로 해왔다.
공사판 일용직 막노동에서 폐지·고물 수집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스물여덟이었던 1988년 초여름, 지금의 세 살 연상 아내를 만나 신앙을 갖고 가정도 꾸렸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때 제가 성경책이 없었거든요.
옆에 있던 아가씨가 내미는 성경을 같이 봤는데, 그 아가씨가 지금의 아내가 될 줄은 몰랐어요.”
김씨는 지금까지 이사만 스무 번도 넘게 다녔다.
서울 신월동, 봉천동, 인천 용종동을 거쳐 부산 해운대, 경남 양산으로도 잠시 내려갔다.
다시 상경해서는 시흥동, 독산동을 거쳐 지금의 난향동에 눌러앉았다.
공교롭게도 그의 가족이 둥지를 트는 곳마다 재개발 지역이었다.
“주변 사람들한테 수소문해서 방세(월세)가 조금이라도 싼 곳을 찾아 왔는데, 돌고 도니 십중팔구 재개발을 앞둔 동네더라고요.”
김씨 가족은 지금 보증금 50만원, 월세 20만원짜리 집에 산다.
그의 삶은 파고들수록 팍팍했다.
앞으로 8년 동안 신용회복위원회에 매월 21만원씩 카드 빚도 갚아야 하고, 첫째 딸(23)의 왼쪽 손목도 고민거리다.
10년 전 놀이터에서 놀다가 왼쪽 손목을 다쳤는데,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둘째 딸(20)은 아직 직장을 못 구하고 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이 손을 잡아주셨어요. 앞으로도 걱정은 안 해요.” 김씨는 또 웃어 보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지난달 24일, 그의 집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었다.
대통령 당선 이후 맨 처음 찾은 민생현장이었다.
같은 동네의 한 주민이 박 당선인 측 인터넷 홈페이지에 김씨 가족의 어려운 형편과 김씨의 꿋꿋한 모습을 소개하면서 이뤄진 만남이었다.
당일 김씨는 박 당선인에게 “저출산 문제와 복지정책을 잘 펴 달라”며 “국민들이 ‘우리 대통령은 진심으로 국민을 아끼고 있구나’ 느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박 당선인은 “열심히 살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며 김씨의 손등을 두드려줬다고 전했다.
김씨 부부는 요즘 구청 도움으로 한식조리 자격증 취득 과정을 밟는 중이다.
필기시험만 13번 떨어진 그는 14번째 시험에서 한 문제 차이로 붙었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소외계층’ ‘월세난민’ ‘신용불량자’…. 세상이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말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김씨, 무슨 좋은 일 있어요?” 항상 표정이 밝은 그에게 주변 사람들이 종종 던지는 질문이다.
목회자가 꿈인 그의 대답은 늘 한 가지다. “하나님 한번 믿어보세요.” 그의 입가에 파인 엷은 웃음 주름이 ‘이 말은 정말이다’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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