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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시 최다 장기기증인’ 사색출판사 대표 최정식 목사

1993년 7월,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병원 수술대에 올랐다.
 만성 신부전증을 앓는 동갑내기 여성에게 신장을 이식하기 위해서였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어른 손 한 뼘만한 수술자국이 어느새 배 위에 남았다. 
의사는 회복을 위해 1∼2주간 입원해 치료받아야 한다고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후회는 없었다. 
온통 ‘이 상처로 한 사람이 생명을 얻었구나’란 생각뿐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몸의 일부를 계속 남에게 떼어줬다. 
93년 신장을 시작으로 2003년에 간을, 2006년엔 조혈모세포를 기증했다. 
헌혈도 꾸준히 했다. 
B형간염 바이러스가 몸 안에 침입한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헌혈이 금지되기까지 헌혈을 해 헌혈증 186장을 받았다. 
2006년엔 췌장 기증 등록을 해 지금껏 기증 받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생체 최다 장기기증인’인 사색출판사 대표 최정식(53) 목사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4일 34년간 헌혈을 비롯, 장기기증을 해 생명 나눔에 기여한 공로로 최 목사에게 ‘2013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2005년 적십자 박애장 금장에 이어 큰 상을 받았지만 정작 그는 무덤덤했다. 
장기기증 동기를 재차 묻자 최 목사는 ‘황금률’로 유명한 성경 구절을 인용해 답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섬김과 봉사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남다른 삶

그의 생명나눔 활동은 고3이던 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에 온 헌혈차에서 처음 헌혈을 한 최 목사는 그때부터 격주마다 혈액 기부를 시작했다. 
학교 시험기간에도 인근 헌혈의 집에 찾아가 헌혈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헌혈자에게 주어지는 여러 혜택 때문에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따끔한 주사 한방으로 피를 나눠줄 수 있다는 데 보람을 느꼈다.
모태신앙이던 최 목사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그의 인생관을 바꾼 스승을 만난다.
개신교 종교철학가로 유명한 다석 유영모의 제자 고 김흥호 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와 개신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을 설립한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이 그들이다. 
기독교뿐 아니라 유불선을 아우르는 김 교수의 지식과 고아, 과부, 행려병자를 거둔 이 선생의 삶에 매료된 그는 92년 학교를 졸업하고 은성수도원에 들어갔다.
“대학생 때 책으로 접한 이현필 선생의 삶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요즘 기독교인이 따라가지 못한 영성가이자 실천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남다르게 살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수도원에선 갈고 닦은 영성을 실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1년간의 수련생활을 마치고 서울 청량리 다일공동체에서 봉사를 하던 그는 우연히 그가 다니던 영락교회에서 한 유인물을 접한다. 
교인에게 장기기증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몸속에서 신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잘 몰랐던 최 목사는 93년 3월 기증 서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신장 기증을 했다.

고난 속의 영성

수도원 영성을 삶에서 실행하고자 했던 최 목사에게 장기기증은 또 다른 ‘영성수련’이다. 
그는 수술 후 고통을 느끼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수술을 하고 나면 한 2주 동안은 배가 아파요. 
회복 기간에 TV를 보며 키득거리는데 배가 흔들려서 그런지 무척 아팠어요. 
그 순간 죄 없는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 고난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 한 생명을 살렸다는 생각이 그를 강심장으로 만든 것일까. 
2003년 최 목사는 간 기증을 위해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한 스님이 신장을 기증한 뒤 연이어 간 기증자가 됐다는 뉴스를 본 게 계기가 됐다. 
다시 장기기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 목사는 2003년 10월 서약서를 제출했고 한 달 뒤 간 기증 수술을 받았다.
두 번째 기증 수술에 대한 가족의 반대는 컸다. 
가족들은 몰래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가족 동의를 위해 수술 며칠 전에만 알리는 최 목사를 걱정하는 눈길로 바라봤다.  
“가족간에 장기기증을 할 때도 수술 전 안 하겠다고 도망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수술에 대한 무서움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전 두렵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옵니다. 
전 하나님 안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죠. 
만약 수술받다 죽어도 걱정할 건 없다고 주변에 말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곁에 가는 것이니까요. 부활의 소망이 있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고 생명 사랑만 남더군요.”
한 생명을 살리는 데 희열을 느낀 최 목사는 2005년 골수도 기증했다. 
2000년 한국조혈모세포은행에 기증 서약을 했는데 6년 뒤에야 그의 골수와 맞는 환자가 나타난 것이다. 
백혈병에 걸린 고등학생을 위해 최 목사는 1000㏄의 골수를 기증했다. 
수술 이후 한국조혈모세포은행으로부터 기증받은 학생이 건강히 잘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듬해엔 췌장 이식 서약을 했지만 7년째 소식이 없다며 아쉬워했다. 
생체 이식을 3회 한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수술을 진행하지 않는 것 같다고 최 목사는 예상했다.

구도자

2006년 이후 그는 더 이상 헌혈도, 장기기증도 할 수 없다. 
그의 장기가 필요한 환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B형간염 흔적 때문에 헌혈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B형간염에 걸린 것도 아니고, 바이러스가 들어왔다 나간 것뿐인데도 혈액의 안정성 때문에 헌혈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
장기기증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최 목사는 홍보 캠페인에 참여해 생명나눔 활동을 계속한다.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마다 대학로에서 조혈모세포 기증 캠페인에 참여하고 헌혈 캠페인에도 꾸준히 참여한다. 
94년 필리핀 마닐라신학대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200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최 목사는 교회 목회는 오래 하지 않았다. 
어려운 이를 돕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02년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다. 
2년 만에 졸업했지만 그는 3년간 수업을 청강하며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청소년부터 노인복지까지 모두 섭렵하자는 생각에서였다.
현재는 출판사 대표로 은사인 고 김흥호 교수의 저서를 출간하고 있다. 
작년엔 요르단 어린이를 위해 옷가지를 모아 보냈다. 
2011년엔 이화여대 대학교회 성도들과 캄보디아로 의료 선교를 다녀오기도 했다.
 앞으로도 구도자적 삶을 살며 내것을 이웃에게 나누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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