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달 전 의원과 문병천 목사

 

이사람-01.jpg

▲ 장영달 전 의원(왼쪽), 문병천 목사.

 

“댁은 어떤 일로 여기까지 오셨소?”
“독재권력에 항거 하다가요. 문형은요?”
“난 강도짓 하다 왔수다.”
“문형, 우리가 한세상 살아가는 데 올바른 생각을 갖고 달리 살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1978년 목포 교도소 독방. 청년 장영달은 한국기독학생총연맹 기획부장으로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와 동년배인 문병천은 72년부터 감방을 들락날락 했던 문제수였다.
교도소 내 불평등한 처우에 항의하며 자해와 단식, 난동을 부리기 일쑤였다.
장영달은 철장 너머로 문씨에게 본회퍼 몰트만 함석헌의 책을 건넸다.
81년 출소한 장씨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의장과 민주통일민중운동인연합 총무국장 등을 거쳐 88년 평민당 총선대책본부 기획조정실장이 됐다.
그리고 전화 한통을 받는다. “장영달 씨 맞으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목포교도소의 문병천입니다.” “아, 문형! 어쩐 일이요?” “저 감방에 있다가 서울대 시험 보러 나왔습니다.” “예? 아직도 교도소 계세요? 서울대는 또 무슨 얘깁니까.”
문씨는 신앙을 갖고 83년부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하루 3~4시간 잠을 자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학력고사 성적으로 279점이 나왔지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에 낙방했다.
문씨는 90년 출소했다. 그리고 91년 41세의 나이에 연세대 신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장씨도 92년 민주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전주완산)에 당선됐다.
그는 매달 문씨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했다.
전과 6범의 죄수에서 신학생이 된 문씨는 결혼도 하고 안양 영등포 여주 청송 전주교도소 등 자신과 같은 과거를 겪고 있는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가 됐다.
이후 두 사람은 비슷하게 인생의 상승곡선을 그렸다.
96년 장씨는 새천년국민회의 재선의원이 됐고 문씨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 합격했다.
이후 장씨는 열린우리당 의원으로 16,17대 국회의원이 돼 4선 고지에 올랐고 문씨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전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두 사람은 또다시 같은 곳에 있게 됐다. 이번에는 독방이 아닌 교회 사택이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지난 4월 민청학련 사건이 무죄로 판결나고 형사보상금 3억원이 나왔어요. 어디 뜻 깊은 곳에 쓸까 고민하다가 문 목사님의 교회당을 마련해 드려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마련된 곳이 전북 완주군 해월리의 늦봄교회(가칭)다.
144평의 대지위에 선 57평짜리 아담한 교회의 개척예배를 위해 두 사람은 주말마다 만나고 있다.
60대의 장씨와 문씨는 또다시 도전을 한다. 한사람은 내년 경남 의령·함안·합천 국회의원 출마로, 또 다른 사람은 교정 공동체 담임 목사로 말이다.
“늦게 온 봄, 늦봄이란 말처럼 나이 육십을 넘어 늦게 희망의 봄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의기투합했어요.” “출소 후 새롭게 인생을 살고 싶은 데 갈 곳 없는 사람들, 특히 소년수 출신들이 이곳에서 예수님 때문에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적 같은 우리 두 사람의 삶 처럼요.” 교회 창립예배는 오는 9월2일이다(010-5840-8978).
<국민일보>

인물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