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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때마다 북한에 남겨진 가족 생각이 가절하다는 새터민 김일현(가명), 신영화(가명:여)씨가 지난 25일 서울 신정동 새터교회에서 강철호 목사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다.


“추석이면 북한에 남아계신 부모님 생각에 숨이 꽉꽉 막히고 원통합니다. 설령 돌아가셨다면 날짜는 알아야 그날을 기리기라도 할 텐데….”
25일 서울 신정동 새터교회에서 만난 새터민 김일현(가명·45)씨는 올해 추석에도 북한이 내다보이는 통일전망대에 가서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김씨는 “북에 가족을 남기고 넘어온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함께 고향 얘기를 나누다보면 뻥 뚫렸던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고 말했다.
김씨에겐 추석과 관련된 추억이 거의 없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생일이 가장 큰 명절이라 우리나라처럼 추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추석 때마다 텔레비전을 통해 고향을 향하는 끝없는 행렬을 지켜보다 보면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다고 했다.
김씨는 국가안전보위부 간부로 있던 아버지가 정치적인 누명을 쓰게 돼 지방으로 좌천되자 김정일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탈출을 감행했다.
1995년 5월 밤 김씨는 허리까지 차오른 두만강을 건너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당시 김씨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총탄에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았다고 한다.
무 사히 중국을 거쳐 남쪽 땅을 밟게 된 이후 김씨는 한동안 혼란을 겪기도 했다. “북한 체제에 반대해서 내려왔지만 남쪽 사람들 속에 섞이지도 못하고 남겨진 가족 걱정도 드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정착을 잘 못한 일부 새터민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구청에 취업했다가 작은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우울증에 빠질 뻔했던 그는 하나님이 늘 자신을 붙잡아줬다고 했다.
김씨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면서 두만강을 건너며 외쳤던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게 됐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 의지했기 때문에 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2007년 남쪽 땅을 밟은 신영화(가명·45·여)씨도 추석이면 북한에 있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밤을 지새운다.
4남매 중 둘째인 신씨는 평양음악무용대학을 다니던 시절 만사를 제치고 자신을 뒷바라지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당시 수업 시간에 쓰는 부채나 작은북 등 신씨의 무용도구를 모두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한다.
“아 버지는 새벽 두세 시까지 무용도구를 만들어서 제 머리맡에 놔주셨어요. 부모님이 아들들을 제쳐놓고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엄청 투자해주셨는데 그런 분들을 내팽개치고 왔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어요. 앓지 말고 오래오래 다시 만나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아계시길 기도합니다.”
신씨는 “무역업을 하던 시아버지가 당으로부터 오해를 사 평양에서 함경남도 시골마을로 쫓겨난 뒤 시부모와 남편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했다”고 말했다.
국경을 넘어온 직후 신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지만 잘못된 소식으로 믿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된 신씨가 한동안 접어뒀던 무용수의 꿈을 다시 꿀 수 있던 건 교회의 도움 덕분이었다.
예술단 출신 새터민들이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새터교회에 마련됐고 교계와 지방자치단체 등의 도움으로 전국 각지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신씨는 “북에선 김일성 김정일을 따르는 것 이외에 어떤 종교도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제 하나님과 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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