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폭발로 아내잃은 은총교회 김선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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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삼척시 은총교회 김선근 목사가 눈시울을 적시면서 고 김혜경 사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평생 사랑과 은혜의 빚을 갚으면서 살겠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을 만났다. 비통한 만남이었다. 아버지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은총교회 김선근(56) 목사. 아들은 김에스라(28)씨.
지난 7월 15일 갑작스런 가스폭발은 성도 수 20여명의 작은 교회인 은총교회를 세상에 알렸다.
김혜경 사모가 주일학교 학생 9명을 위해 간식을 마련하던 중 LP가스가 폭발해 모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전신 64%의 화상을 입고 치료 중이던 김 사모는 지난 9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사모와 아이들이 치료받던 서울 영등포 모 병원 인근에서 머물던 김 목사를 최근 만났을 때, 그는 눈시울 붉히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갑자기 밖에서 ‘꽝’ 소리가 나서 뛰어와 보니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어요. 아내와 아이들이 살갗이 다 탄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더라고요.” 사고가 난 지 3개월이 됐지만 그 몸서리치던 순간들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한번의 사고로 김 목사 가족의 삶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남편은 아내를, 아들은 엄마를 잃었다. 아직도 중환자실에 머물고 있는 아이가 있고 퇴원한 아이들도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상처가 언제 치유될지 모른다.
이런 절박한 사고와 고통 가운데 인간이 외칠 소리는 한마디밖에 없을 것이다. “주여, 왜!” 김 목사도 사고 이후 수없이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주여, 당신은 왜?”
총신대를 졸업한 김 목사는 서울과 평택에서 목회를 하다 2009년 3월 삼척 탄광촌의 은총교회에 부임했다. 그의 목회는 평탄하지 못했다.
총신대 대학원을 마친 뒤 미국 풀러신학교에서도 공부했던 김 목사는 평택에서 담임목회를 펼쳤으나 뜻하지 않던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땅에 ‘푸르디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을 오게 하는 꿈을 품고 시작한 목회가 좌초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그 가운데 김 사모가 극심한 정신쇠약에 시달렸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내와 도계로 내려왔다. 지역적·상황적으로 볼 때 도시에서 말하는 부흥은 쉽지 않았다.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생각해보니 목회가 별게 아닌 것 같아. 여기서 그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목회라는 생각이 들어. 동네 사람 섬기는 목사로 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다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실 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사모는 육신적·정신적으로 회복되었다. 김 목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부친이 목회하던 서울 정릉의 교회에서 김 사모를 처음 만났다.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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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김혜경 사모와 외아들 김에스라씨(왼쪽). 사고 직후 병상에서의 김혜경 사모(오른쪽).


교회 학생회 활동을 함께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연애를 할 수 없어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 결혼까지 이르렀다.
“아내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입니다. 사진 속 인상대로입니다. 가르치던 주일학교 아이들이 ‘천사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청년부에서도 ‘천사’ 소리를 들었습니다. 시도 잘 썼고요. 기타도 곧잘 쳤습니다.
누구나 호감을 가져했습니다. 아내를 한번 본 사람은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미인이라서가 아니라 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영적 품격이 있었습니다.”
김 목사는 그리고 한마디 하려다 왈칵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이 데려 가셨어요. 그대로 두면 너무 힘들까봐. 너무 힘들까봐서요….”
결혼을 앞두고 김 목사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해 주셨어요. 하나님이 내가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게 했고, 사랑하게 했고, 결혼하게 해 주셨습니다. 살면서 혹 당신에게 결점이 보이더라도 믿음으로 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 버리지 않는 한 당신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가스폭발 이후 김 사모는 고운 모습 모두 사라진 처참한 몰골이 됐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아내를 보면서 김 목사는 가슴을 쳤다.
의사는 설사 생명을 건진다 하더라도 팔과 다리를 절단하고 한쪽 안구도 적출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의사는 차마 그 뒷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김 목사에게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어떤 장애를 안고 퇴원하더라도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면서 한번 살아보겠습니다. 하나님, 제발….’
김 사모는 결국 이 땅을 떠났다. 옆에 있던 외아들 에스라씨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그동안 어머니에게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너무나 아쉽네요. 너무나.”
사고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태백장로교회 이강선 목사는 전국을 다니면서 도움을 호소했다. ‘하나님 땡큐’의 저자로 7명의 아이를 입양한 윤정희 사모는 500만원을 아이들 치료비로 내놓았다.
윤 사모와 가족들은 한 달에 생활비로 30만원 이상을 쓰지 않는다. 윤 사모는 “같은 사모 입장에서 김 사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막혀 오더라고요. 갑자기 500만원이란 거금이 생겨서…”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김 목사는 자신과 교회가 이 땅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사랑의 빚을 졌다고 말했다. “저는 자존심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남에게 신세지기 싫었고, 은혜를 입으면 그것을 갚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받은 은혜는 저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분량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도 마찬가지겠지요. 나로선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 이제 남은 삶 동안 그 사랑과 은혜 갚으며 살아야지요.”
김 목사는 자신의 지난 목회 과정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으로선 모르겠다면서 그저 하나님 뜻대로, 흘러가는 대로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모금을 주도하는 삼척시교회연합회 등에 따르면 사고 이후 상당한 액수가 모금됐지만 장애 후유증을 겪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은총교회:033-541-5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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