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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을 위해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지난 20년 동안 순탄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통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순간이 기적의 연속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가장 소외된 자들을 돕는 밀알복지재단(이사장 홍정길)이 올해로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그 중심에는 20대 청년시절부터 반백의 장년이 되기까지 오롯이 장애인과 함께해 온 정형석(56) 대표가 있다.

 

장애, 낯설지 않은 이유

 

시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안면마비의 장애를 갖고 계셨다.
친구들이 “형석이 아버지는 삐뚤이”라고 놀릴 때마다 화가 났지만 이로 인해 장애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갔던 기억이 많다.


어머니는 예수 믿는 사람은 어렵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아버지를 통해 장애를 이해하게 하셨고, 어머니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가르쳐 주셨다.

 

-밀알에서 전임사역자로 헌신하게 된 사연은.

 

“1980년 친구를 따라 밀알복지재단의 모태가 된 밀알선교단 회원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84년 밀알선교단의 대표직을 맞고 있던 이재서 단장이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전임사역자로 일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대학 4학년을 맞아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밀알의 급여 수준은 최저임금에 가까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아무도 없다는 이 단장의 말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또 그 무렵 친하게 지내던 정신장애 소년이 교회에 간다고 집을 나선 후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게 되면서 평생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기로 결심했다.”

 

밀알로 굴곡진 인생

 

밀알선교단 시절을 포함해 30년 넘게 밀알과 함께해 온 정 대표. 그의 인생은 밀알의 굴곡이나 다름없다.


오늘이 있기까지 기쁘고 보람된 순간도 많았지만 아프고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적지 않았다.

-힘들어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남에게 부담스러운 말을 건네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직원 급여부터 운영비, 사업비, 행사비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모금에 의존하는 사회복지사업이다 보니 지난 수십년간 단 하루도 모금에 대한 걱정과 압박에서 자유로웠던 날이 없었다.
때때로 모금을 하러 다니다 마음에 상처까지 입는 날엔 장애인 사역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마다 제발 돈걱정 없이 하나님 일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밀알복지재단 설립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던데.

 

“종교단체 이름으로는 정부의 지원이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법인 설립을 추진했다.
10억원의 자금이 필요해 1년 이상 모금을 진행했지만 1억원도 모이지 않았다.
낙심하면서 법인 설립의 꿈을 접으려 할 즈음 하나님은 두 천사를 보내주셨다.
익명을 요구하는 목사님과 선교사님이 10억원 상당의 빌딩과 3억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했다.
이것을 기본 재산으로 93년 7월 15일 밀알복지재단이 설립됐다.”

 

땀과 눈물로 틔운 싹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장애인을 위한 사업을 대부분 혼자 감당하던 그는 84년 위천공 진단을 받았다.
또 2000년대 초반엔 뇌졸중이 왔으나 비교적 빨리 병원을 찾아 입원 2주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강의 악화보다 그를 더 힘들게 했던 건 밀알학교 건축이었다.

 

-건축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내 아이는 배울 곳이 없습니다’라는 장애아 부모의 통곡으로 장애인 특수학교 건축을 추진하면서 홍정길 목사님이 도와주셨다.
그러나 설립 과정은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당시 주민들의 반대로 구청장이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건축법이 개정되지 않았다면 건축할 수 없었다.
건축 허가권자가 구청장에서 교육감으로 바뀌어 건축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주민들의 물리적 반대로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공사방해 중지 가처분이란 법적 소송을 했고 이 소송에서 이겨서 어렵게 건축하게 됐다.
장애인 시설에 대한 님비현상을 극복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97년 밀알학교를 개교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기공예배를 앞두고 현수막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일부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위협했다.
결국 주민들을 피해 남서울은혜교회 교육관에서 슬프고 비통한 마음으로 모두 울면서 예배를 드렸다.”

 

-재단의 오늘이 있기까지 소리 없이 도운 두 인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손봉호 교수님과 홍정길 목사님이다. 두 분은 나의 멘토다.
손 교수님은 특유의 강직함과 청렴함으로 밀알의 재정 투명성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홍 목사님은 밀알이 어려울 때마다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을 지원하고 남서울은혜교회를 행사 장소로 제공했다.
또 홍 목사님은 기도 중 ‘밀알학교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건축을 돕기 위해 남서울은혜교회를 사임하고 퇴직금, 적금, 장인에게 받은 유산까지 건축헌금으로 내놓았다.”

 

장애인 생애주기별 복지 서비스

 

20년 전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은 이제 열매가 돼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밀알복지재단은 현재 장애인·아동·노인 복지사업, 지역사회 복지 및 국제개발사업의 4가지 사업을 펴고 있다.


43개 산하 시설과 2개 지부, 해외 17개국에서 23개 사업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복지사업재단으로 성장했다.


직업재활사업으로 굿윌사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또 영성 회복을 위해 내년에는 밀알영성센터 건립도 준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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