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성형외과 한영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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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호 원장은 “내 노력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사가 됐다”면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진솔하게 풀어 놓았다.

 

매일 새벽예배에서 기도할 때마다 ‘왜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날 이렇게 사랑하시고 복 주셨는가’를 생각한다.
성형외과 전문의로 서울 압구정동에서 진료를 하고 있지만 내 노력으로 의사가 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 의사의 꿈은 언감생심이었다. 내가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다.
이런 상황에서 절망을 지우고 의사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간절하게 기도했던 공이 크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63년 경남 남해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교회에 갔다. 너무 외로워서 갔다. 3남1녀의 맏이로서 홀어머니와 가족을 부양하는 삶이 고단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 어머니와 동생들도 그랬을 것이다. 가정 형편을 걱정하던 첫째 남동생이 중학교 3학년 때 가출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1년 뒤 어머니도 돈을 벌어 오시겠다고 집을 나가신 뒤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 집 근처 교회에서 매일 울며 기도했다. ‘목사님이 기도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나는 깜깜한 교회 구석에서 가출한 동생이 잘 있게 해 달라고, 어디 계시든 어머니가 건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교회에 가서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동생이 나간 날부터 시작한 기도가 4년이 지나도록 하나도 응답받지 못했다.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나는 대학진학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포기상태였다.
어려운 집안 상황도 문제지만 생계를 위해 농사짓느라 결석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 연락이 왔다. 대구에서 혼자 사셨다는 어머니는 대학 진학을 권하셨다.
학비를 지원해주신다는 어머니의 제안은 고마웠으나 당시 꿈이 없었던 나는 어디로 진학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목사님의 추천으로 무엇을 배우는 전공인지도 잘 모른 채 목사님 아들과 함께 대구보건대 물리치료과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는 물리치료뿐 아니라 해부학을 가르쳤다. 나는 해부학에 큰 흥미를 느꼈다. 이때 처음으로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연한 기도였다. 학창시절 성적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제대로 공부해 본 적도 없어 도전할 용기도 없었다. 21살의 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채 군대에 갔고 전역한 뒤 대구보건대를 졸업했다.
가정 상황은 여전히 나빴다. 나아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필리핀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아는 형님이 필리핀으로 나를 초청했다.
단순히 머리를 식히러 갔던 필리핀에서 나는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 의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형님도 내게 의대 진학을 권유했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내게 이 말은 꿈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시 내 학력은 초대졸이었다.
이곳에서 의학공부를 하려면 새롭게 공부를 해야만 했다. 영어로 공부하느라 힘들었지만 나는 1992년 라이시움 대학교 물리치료학과 3학년에 편입해 졸업했고 뒤이어 버진 밀라그로사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21살 때 기도제목이 30살이 넘어서 이뤄진 것이다. 의대 졸업 2년 전인 32살에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그저 기도밖에 한 게 없는데…. 내 기도를 다 듣고 계셨구나. 하나님은 정말 계신다!”
유학 시절 나는 한국 선교사들과 함께 의료봉사를 다니곤 했다.
봉사는 주로 수술이나 치료보다는 구급약을 나눠주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아쉽게도 주민들은 약만 챙겨갈 뿐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 방식보다는 아무래도 병원을 지어 지속적으로 치료해 주는 방향이 선교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의료선교에 대한 비전이 명확하지 않았다. 교회 봉사는 열심히 했지만 내가 좋아서 열심히 일한 것 뿐, 하나님의 뜻을 위해 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변하게 된 계기는 돌아가신 할머니 꿈을 꾸고 나서부터다. 부모님 대신 사랑으로 키워준 할머니는 생전 주님을 믿지 않으셨다.
당시 할머니 곁을 지킨 목사가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했지만 곁에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 나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7년간 할머니의 회심을 위해 기도했던 나는 돌아가신 이후에도 2년간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께 할머니가 천국에 계신지 묻고 또 물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꿈에서 선명하게 할머니가 계신 곳을 보여주셨다.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집에 할머니는 살고 계셨다.
내가 배우고 생각했던 천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를 본 나는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때 깨달은 것은 ‘구원은 받았으되 상급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 혼자 구원받으려고 믿으면 안 되겠구나. 사역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얻게 된 결론이 바로 ‘해외 의료선교’였다.
할머니의 회심을 확인하려 드린 기도가 오히려 내 삶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
내가 꿈꾸는 의료선교는 선교지에 병원을 세우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 옆에 병원을 세워야 하고 한국 의사들이 현지 의사들에게 일정 기간 이상 의료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봉사해 보니 현지인을 치료할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일반적으로 낙후된 선교지엔 아픈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선교 효율성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이들의 몸은 의사가, 마음은 선교사들이 치료해줘야 하기에 반드시 교회 옆에 병원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병원 차트에 사인할 때 나는 항상 ‘그레이스’라고 적는다. 의사가 된 것은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매순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은혜로 복을 받았으니 이제는 돌려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현재 목회자나 어려운 환자들에게 저렴하게 수술을 해 주거나 돈을 받지 않기도 하지만 앞으로 해외 의료선교에 더 집중하고자 한다.
감사하게도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강남지역 의료인 15명으로 구성된 의료선교인 모임을 내년 1월쯤 발족할 예정이다. 바른 신앙으로 의료선교를 하기 위해 신학공부도 계획하고 있다. 내 나이 48세, 이제 생명을 넘어 영혼을 살리는 의사로서의 삶을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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