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정훈희의 노래 그리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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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훈희씨는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제이스 버거’ 한편에 마련된 마이크를 붙잡고 3곡을 연달아 불렀다. 하나님께서 이 목소리를 또 주신다면 다시 태어나도 당연히 가수를 하겠다고 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면/낯익은 당신의 모습이/내겐 눈부신 햇살을/미소로 뿌려주네//깊은 밤 눈을 감을 땐/따스한 당신의 입술이/지쳐 숨죽은 이 몸을/꿈길로 끌어 주네”
1960, 70년대의 디바(가창력이 뛰어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가수) 정훈희(60)씨가 남편 김태화(64)씨와 결혼10주년 기념으로 발매한 음반에 수록된 ‘우리는 하나’다. 기자가 약혼식 때 예비신랑과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맑고 고운 목소리의 여가수에 필이 꽂혔다. 어린 팬은 이제 한참 어른이 되어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를 만났다. 최근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 ‘제이스 버거’에서 그의 40여년 노래와 삶, 신앙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제이스 버거는 60, 70년대 한국 록을 일군 밴드 ‘히식스’ 멤버이자 정씨의 오빠인 정희택씨가 운영하는 수제 햄버거 집이다.

 

계속된 가수의 길
올해로 데뷔 44년을 맞았는데도 여전히 활짝 웃는 얼굴이 그대로다. 자연스럽게 쓸어올려 묶은 긴 파마머리, 큰 눈, 가냘픈 몸매, 맑은 목소리. 나이를 참 곱게 먹었다는 느낌이다. 그동안 활동이 뜸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대번 돌아온 대답은 기자를 머쓱하게 했다.
“어머, 난 꾸준히 하고 있는데요. 1년에 서너 번 열린 음악회, 7080콘서트 등에 출연하고 매주 화요일 아침방송에 패널로 나가고 있는데 TV를 안 본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요. 많이 하지 않을 뿐인데.”
요즘도 계속 노래하고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각 지방의 가을음악회, 산상음악회 등. 교회에서도 집회, 행사를 많이 한다. 희택씨의 딸인 가수 제이와 듀엣을 하는 등 후배들과도 많은 노래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라디오에서 ‘정훈희의 가요쇼’도 진행했다.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가요쇼는 인생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즐기며 한 방송이었다고 했다.
2008년에는 데뷔 40주년을 맞아 후배들과 ‘40th 애니버서리 셀러브레이션스 정훈희’란 이름의 음반을 내고 콘서트도 가졌다. 음반에는 ‘안개’ ‘꽃밭에서’ ‘그 사람 바보야’ 등 히트곡 3곡, 오리지널 버전의 ‘무인도’와 작곡가 고 이영훈의 ‘사랑이 지나가면’까지 총 13곡을 담았다.
“TV에 자주 나오라는 요청이 오면, 노래 잘하는 후배도 많은데 난 가끔 나가겠다고 말해요. 어떤 역할을 어떻게 해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만 있다가 드리는 것보다 좀더 발전시켜서 돌려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운명적인 노래 인생
아버지(정근수·작고), 작은아버지 모두 가수였다. 모태신앙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모든 가족이 크리스천이었다. 귀가 뚫렸을 때부터 이미 노래를 들었고 교회에서 주일 성가대로 섬겼다. 주일 성가대는 보통 초등학교 5, 6학년이 할 수 있는데 그는 3학년 때부터 했다. 그때부터 이미 준비된 가수였다. 데뷔 전에는 주일학교에서 노래한 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스탠더드팝, 재즈 등을 가르쳐줬다. 국민의 1%도 외국에 못 나가던 60년대 자신을 제외하고 완벽한 영어발음으로 노래하는 가수는 없었다고 정훈희는 말했다. 고교 1학년이었던 67년 방학을 맞아 밴드 마스터였던 작은아버지를 따라와 서울 모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바로 그때 고 이봉조 작곡가가 그 소리를 들었다.
“쪼맨한 가시나가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
당시 이 작곡가는 ‘안개’를 만들어놓고 자신의 색소폰 연주로 취입하고 그 노래에 맞는 목소리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정훈희-이봉조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국가대표 가수
70년 도쿄국제가요제에 참가했다. 헝가리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거의 선진국에서 가수들이 참가했다. 너무 떨렸다.
“주님 더 잘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미 제게 좋은 목소리를 주셨으니 떨지 않고 가사 잊어버리지 않고 노래만 부르게 해주세요.”
기도의 힘이 어떻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드렸다. 이 작곡가는 불교신자라 관세음보살을 찾으며 마구 떨었다. 이 작곡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선생님 어차피 떨어질 거면 떨어져요. 선생님은 노래도 부르지 않는데 왜 떠세요. 떨면 제가 떨어야지요.”
믿는 사람들은 담대함이라고 하지만 안 믿는 사람은 ‘깡’이라고 한다고 했다. 기도의 힘을 믿은 그는 깡이 있었다. 이것이 이 작곡가가 그를 데리고 국제가요제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 가요제에서 다섯 개의 상 가운데 3개를 거머쥐었다. 동상, 최고가수상, 최고작곡가상이다. 이후 콤비는 여러 국제가요제에서 상을 휩쓸며 국제적인 명성도 얻었다. 71년 그리스국제가요제, 72년 도쿄국제가요제, 75년 칠레국제가요제 등에서 입상했다. 자연스레 ‘국가대표 가수’란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최대 위기가 닥쳤다. 75년 공연정화법 규제에 의해 가수의 80% 이상이 잡혀 들어간 대마초 파동에 그도 끼고 말았다. 대마초를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훈방됐다. 하지만 ‘대마초 가수’라는 낙인이 찍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
81년 규제가 풀렸지만 예전같이 노래 부를 수 없었다.
“죽기 살기로 노래해도 사소한 것 하나로 버림받자 좌절감과 섭섭함이 컸어요. 그 뒤 가스펠과 골든 히트 음반, 남편과 함께 낸 ‘우리는 하나’를 빼고는 정규음반을 내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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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10주년 기념 음반 ‘우리는 하나’의 재킷 사진.

 

남편 김태화
그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결혼’을 꼽았다. 당시 결혼은 곧 은퇴를 의미했다. 79년이었다. 남편은 노래를 잘했고 목소리도 매력적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눈엔 이미 콩깍지가 씌었다. 시어머니를 모시며 20년 넘게 사는 동안 시어머니는 항상 그의 편이었다. 김치도 담가 먹고 웬만한 일은 다 했다. 대한(29), 민국(24) 아들이 둘 있다.
밖에서는 과묵한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수다쟁이가 됐다. 여우같은 남편, 곰 같은 마누라였다. 남편이 두 번의 큰 사고를 쳤다. 정훈희가 이혼하자고 했다. 남편은 다섯 가지 이유를 들며 거부했다.
“예쁘지, 노래 잘하지, 돈 잘 벌지, 내가 웬만큼 나쁜 짓해도 참고 살아주지, 고부간 갈등 없이 시어머니 잘 모시지. 내가 미쳤어? 자기랑 이혼하게.”
그렇게 30여년을 살고 있다. 기도도 한몫했다.
“주님께 기도해요. ‘처음 이 남자한테 반해 산 것처럼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해도 계속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영원한 디바
후배 사랑이 남달라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인기와 돈은 생각지도 않게 올 수 있고 생각지 않게 떠날 수 있어요. 언제든지 내 몫을 해낼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서 실력을 닦아놓아야 해요.”
요즘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K팝 바람에 대해서는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혹시 아이돌들이 실수할 경우 기다려주고 격려해줘야 한다고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낙마했을 때 그들을 건져 올려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주말마다 남편이 운영하는 부산 기장군의 카페에서 노래로 팬들을 만나고 있다. 노래에 대한 열정과 애착으로 “다시 태어나도 가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두 사람이라도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가수 정훈희의 이름을 걸고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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