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세종문화상 수상 탤런트 김혜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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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20년 동안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세계 15개국을 다니며 소외된 이웃의 참상을 국내에 알려온 그는 이제 한국의 어머니에서 세계 빈곤국가의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다.

 

그를 만나면서 아프리카에서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을 돌보며 말년을 아름답게 보낸 세기의 배우 오드리 헵번을 떠올렸다.
‘유니세프 친선대사’와 ‘월드비전 친선대사’ ‘아름다운 봉사자의 삶’이 중첩됐다.
그는 영원히 아줌마가 될 것 같지 않은 소녀적 감수성과 한국적 어머니상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 신비한 힘은 아마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현된 것 같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상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러워 거절하고 싶었지만 상금 3000만원이 너무나 유혹적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케냐 소말리아 난민촌에서 질병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전과 기근을 피해 목숨 걸고 한 달 이상을 걸어 난민촌에 왔지만 정작 먹을 것이 없어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영양죽을 먹이겠습니다. 나의 힘 되신 여호와 하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13일 ‘제30회 세종문화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한 자리에서 탤런트 김혜자(70·남대문교회) 권사가 밝힌 소감은 듣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20년 동안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살아온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케냐 동북부 지역인 와지르와 소말리아 국경에 위치한 다답 난민캠프를 다녀온 그에게 현지 상황과 그의 삶, 그리고 신앙 이야기를 들었다.

 

다답 난민캠프
그가 그곳에 가게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7월 초 텔레비전 뉴스에서 아프리카 소말리아 여성이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아기를 안고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어린아이 5명 중 3명이 홍역이나 감기,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데 먹을 것도 약도 없어 손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했다.
그날 채널을 돌릴 때마다 세 차례나 똑같은 내용의 뉴스를 접하면서 ‘그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케냐와 소말리아 접경지대에 있는 다답 난민캠프였다. 부르심이라고 믿었다.
“나이가 들면서 늘 이번이 마지막 방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아이들이 더 간절히 보고 싶었어요. 에티오피아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지만 그곳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마음에 월드비전에 전화해 가자고 요청했어요.”
다답 난민캠프는 20년 전부터 형성돼 세계인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지워지고 있는 곳. 그러나 60년 만의 가뭄과 기근으로 2∼3년 전부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소말리아인들이 내전과 기근을 피해 하루 1200∼1500명이 몰려와 세계 최대 규모의 난민캠프가 돼버렸다.

 

5일 동안 두 아이를 잃은 엄마
그곳은 빨간 점멸등이 켜진 긴급구조 상황이었다. 그가 만난 한 여성은 한 달 이상을 걸어오면서 굶주려 아이들이 아프고 지난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네 살 된 아들은 다리의 근육조직이 없어져 무릎이 뭉툭하고 영양실조로 배가 풍선처럼 불렀다.
또 한 아버지는 난민촌으로 오는 중 표범이 달려들어 아들을 채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옆에 있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쫓아가지도 못했다며 울었다.
“한 소말리아 여성은 ‘5일 동안 아이 두 명을 홍역으로 잃고 이제 한 명만 남았다’고 했어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죽기 살기로 난민촌에 왔지만 먹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해 죽는 것이지요. 배고파서 죽는다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입니다.
먹이면 살 수 있어요. 죽 한 그릇, 영양제 하나면 한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난민캠프에 들어가지 못한 30만명이 근처에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움막 주변에 작은 아이들의 흙무덤이 즐비했어요. 더 빨리 찾아오지 못한 미안함에 많이 울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 상황과 너무나 비슷했습니다. 어른 손가락 두개 정도 굵기의 가느다란 아이의 팔, 홍역으로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아이 머리 위에 배급받은 식수를 뿌려주고 있는 엄마, 양푼에 남아 있는 말라붙은 국수가닥을 뜯어 먹는 아이들이 아직도 눈에 밟힙니다.”
그는 죽 한 그릇 영양제 하나면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며 월드비전 동아프리카 긴급구호(02-2078-7000)에 동참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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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아프리카 케냐를 방문한 김혜자 권사가 현지 어린이들과 함께했다.

 

생애를 지배하게 된 여행
그가 처음 봉사활동을 떠난 것은 1992년 여름이었다.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주말연속극 ‘사랑이 뭐길래’가 끝나고 대학을 졸업한 딸과 함께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때 월드비전에서 “우리가 받았던 도움을 다른 나라에 돌려줘야 하지 않겠냐”며 친선대사로 아프리카에 함께 가자고 했다.
여행하는 마음으로 간 에티오피아에서 그는 지옥보다 더 비참한 삶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모태신앙인인 그는 “하나님! 당신이 마음이 상하시는 일에 제 마음도 상하게 해주세요”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그 여행이 생애를 지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드라마 ‘전원일기’ 녹화를 하다가 밥먹는 장면이 나와도 굶주림에 지쳐 울지도 못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월드비전에서 소말리아에 가자고 요청했다. 자신이 없어 망설였다. 그때 구로공단에서 재봉공으로 일하는 한 처녀가 전화를 했다.
“소년소녀가장을 돕기 위해 8만1000원을 모았는데 소말리아 성금으로 보내고 싶다고 했어요. 순간 ‘아 이 처녀가 나를 또 소말리아에 가라고 하는 구나’라고 생각했죠.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어요.”
이후 그는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등 15개국을 20여 차례 방문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참상을 국내에 알렸다.
뿐만 아니라 103명의 제3세계 아동과 일대일 결연을 맺어 후원하며 사랑을 전했다. 시에라리온에는 ‘마담 킴스 프로젝트’란 기술훈련센터를 지어주고, 라이베리아에는 4개의 고아원 건물을 신축하거나 재건축해 주었다.

 

소명을 좇아서
운명처럼 만났던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일류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도, 좀 비싸다 싶은 핸드백을 살 때도 ‘이 돈이면 500명의 아이들을 하루 배불리 먹일 수 있는데, 이 돈이면 10명의 아이가 1년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있는데…’라고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는 습관이 생겼다.
“앙상한 아이들을 안을 때는 슬프고도 행복해요. 예전엔 배우라는 화려한 조명 속에 마음속 어디엔가 끝 모를 허무감이 존재했었어요. 그러나 지구촌 곳곳의 가난한 이웃을 만나는 동안 연기를 하면서는 깨닫지 못했던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유명한 배우로 만든 것은 이렇게 쓰시려고 그랬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는 자신이 한 일을 결코 봉사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평범한 인간이라도 기근 현장에 가면 돕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한 일보다 너무 좋은 말만 들었어요. 저는 매일 죽음을 준비하며 삽니다.
임종의 순간에 얼마나 소유했고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느냐로 평가받고 싶어요.”
그는 2004년 세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한 10여년의 기록을 담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출간하기도 했다.
향후 10년간의 인세 전액을 월드비전에 기증했고 그동안 인세는 북한 용천 긴급구호와 태백에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공부방’을 세우는 데 쓰여졌다.
그는 자신의 일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3년 전 함께 수단에 다녀온 패션디자이너 이광희씨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오랜 내전으로 황폐해진 수단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여성과 아이들을 만난 이씨는 한국에 돌아와 사단법인 ‘희망의 망고나무’를 설립해 현재 아프리카 빈곤가정을 돕고 있다.

 

‘LA비평가상’보다 ‘더 멋진 상’
그는 지난 1월 영화 ‘마더’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영화비평가협회(LAFCA)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시아계 배우론 처음 받은 영예로운 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더 멋진 상을 준비하고 계셨다. 미국 어바인에 살고 있는 딸이 한 달만 자기 집에 머물며 새벽예배에 가자고 했다.
“그 상을 받으러 미국에 가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어요. 어바인온누리교회에서 20여일 동안 새벽예배를 드리던 3일째,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렀어요. 그리고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어요’라는 말만 나왔어요.
하나님이 저를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생각하니 정말 죄송해 눈물이 났어요. 한참을 울며 기도한 후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충만했어요.”
그는 한국에 돌아와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인 하용조 목사를 만났다. 침대에 누워 투석하고 있는 하 목사를 보는 순간 그는 주체할 수 없이 또 울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난 하나님 이야기를 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그때 하 목사는 “김 권사님, 성령 받으셨군요. 내가 스무 살 때 모습과 똑같아요. 울었다 웃었다”라고 했다.
낯을 많이 가렸던 김 권사는 “목사님. 정말 저 성령님 만난 것 맞아요?” 하며 기뻐했으면서도 “저 간증시키면 안돼요”라고 당부했다. 그런 그가 13일 시상식장에서 담대하게 여호와를 따르는 자임을 선포했다.
그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 19:14)란 말씀을 좋아한다. 그래서 매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산다. “우리 삶이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항상 생각하며 살았으면 해요.”
이제 한국의 어머니에서 세계 빈곤국 아동들의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는 그는 힘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제3세계 아이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아마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배우로서의 인생보다 아프리카의 고통 받는 어린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더 행복했었다”고 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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