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언더우드상 김용애 선교사, 노중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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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총장 김한중)는 11일 서울 교내 노천극장에서 김용애(남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와 노중기(중국 옌벤대 복지병원) 박사에게 언더우드상을 수여했다.
이 상은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2001년 제정됐다.
본보는 두 수상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소감 및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용애(67·서울 원천교회 파송)

선교사는 11일 “두려움이 앞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20년째 사역중인 그는 생각지도 못한 큰 상을 받는 게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것인지 두렵다고 했다. 또 아직 끝나지 않은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이번 수상식에 참석하기 앞서 뜻밖의 어려움을 겪었다. 휠체어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두달 간 입원까지 해야 했다. “지난 7월12일 밤이었어요. 강도가 갑자기 집에 들이닥쳤어요. 제 몸을 꽁꽁 묶고는 다짜고짜로 돈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돈이 없다고 하자 가차 없이 몽둥이로 내리쳤어요. 심지어 제 얼굴 오른쪽 빰에 칼을 대고 그었습니다.”
김 선교사는 그날 밤 5∼6시간 고문을 당했다. 온 몸은 피멍으로 얼룩졌다. 강도들은 온 집안을 뒤졌지만 현금을 찾지 못하자 모든 집기들을 차에 싣고 달아나버렸다. 선교사로 활동한지 20년 만에 처음 강도를 만났다. 그는 매주 2500여명의 현지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푸드뱅크’ 사역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강도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한 모양이다.
“한참 (강도들에게) 얻어맞고 있는데 불현듯 ‘이래도 저들을 사랑할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강도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선교사의 집을 털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에 이르자 용서의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의 사역지는 남아공의 수도인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쪽으로 130㎞ 떨어져있는 포체프스트룸 빈민가다. 25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그는 1991년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이끌려 혈혈단신 남아공 흑인 빈민가로 들어갔다. 낯선 동양인이 서툰 영어로 말씀을 전하자 흑인들은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 흑인학교를 찾아가 전도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애원했어요. 당연히 문전박대였죠.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제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딱 한번 학생들에게 들어보게 한 뒤 학생들이 거부하면 곧바로 포기하겠다고 했어요.”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메시지에 학생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 결국 학교 측이 그에게 채플을 정식 인도해줄 것을 요청하게 됐다. 김 선교사는 법원을 찾아가 재판을 받으러 온 사람은 물론 판검사, 변호사 등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사역한지 3년만에 ‘포체프르스룸 뉴비기닝센터’(PNBC. 일명 ’아티클 21‘)를 세웠다. 남아공정부로부터 토지 1.8헥타르(5445평)를 무상으로 받아 교회를 제일 먼저 설립했다. 이어 후천성 면역결핍증(에이즈)으로 소망 없이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보육원 ‘천사들의 안식처’를 세워갔다. 이는 어린이 6명과 위탁부모를 연계시켜 함께 살아가도록 돕는 프로젝트다. 벌써 6채나 지었다. 2채는 거의 완성단계다. 모두 50채를 세우는 게 목표다.
그는 앞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방과후 교실을 개설, 미술 스포츠 음악 직업 교육으로 삶의 질을 높여갈 계획이다. 이 때문에 동역자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제 나이가 적지 않아요. ‘하나님이 보신다’는 생각으로 함께 할 분들이면 됩니다. 그 땅에 남는 것은 ‘김용애’라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잖아요.”

 

 

노중기 (59·사진·중국 옌벤대 복지병원 부원장)

노중기 박사는 11일 언더우드상을 받고 “이런 상을 받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겸손해했다.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천안 순천향대 흉부외과 교수로 재직하던 노 박사가 중국으로 떠난 것은 18년 전. 심장수술 전문의로서 잘 나가던 의대 교수직을 버린 것은 순전히 소명 때문이었다. 심장병으로 고통 받는 오지 사람들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해주어야 한다는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이었다.
천안 갈릴리교회(이창준 목사)를 출석하던 그는 국내 병원 및 교도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환자들을 돌봤었다. 해외로도 눈을 돌려 환자들을 돌보면서 돈이 없거나 의료시설이 부족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만날 수 있었다. 봉사활동을 할수록 환자들의 고통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993년 11월 중국 지린성 옌지시 중한 합작 옌벤대학 복지병원으로 떠났다.
“가서 보니 정말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장수술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았고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심장수술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50병상 정도의 작은 병원 규모로는 심장수술은 엄두도 못 냈다. 할 수 없이 심장병으로 고통당하는 조선족과 중국인들을 한국에 데려와 수술을 받도록 해주었다.
노 박사가 다시 메스를 잡은 것은 99년. 병원 사정이 좋아져 심장 수술이 가능케 됐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800명 가까이 수술을 했다. 환자들은 중국 곳곳에서 왔다. 총 26개성에서 온 환자들이 진료를 받았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환자가 환자를 소개해 병원을 찾았다.
그는 수술에 앞서 항상 환자를 위해 기도했다. 기도는 환자들의 두려움을 녹였다. 환자들은 그의 기도를 듣고 의사를 신뢰했다. 그는 수술을 집도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수술비까지 지원했다. 헌혈이 필요하면 자신의 팔을 걷어 부치기도 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수술 후 환자를 만나는 때라고 한다. 병원이 아니라 그들의 집에서였다. 노 박사는 수술 후 두 달 내에 꼭 가정방문을 했다. 먼 곳에 사는 환자를 위해 기차로 2박 3일을 걸려 찾아가기도 했다. “환자들은 너무 좋아했고 저도 기뻤어요. 수술한 의사로서 일종의 ‘애프터 서비스’라 생각했어요.”
노 박사와 병원 직원들은 지역별 의료 봉사도 떠났다. 심장병 수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장학금도 지원하고 체육대회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결성한 ‘새심회’는 심장수술을 받고 완쾌된 환자들의 모임이다. 10년 동안 중국 내 리더들도 배출했다. 리더 중에는 목회자도 있다.
노 박사는 “봉사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그저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 박사의 모토인 성경구절은 골로새서 1장 25절이다. “이 말씀은 심장수술을 하는 의사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직분이라는 걸 재확인시켜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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