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02.jpg

▲ ‘크리스천의 감동 스피치’ 특강으로 분주한 신은경 권사는 “힘이 있는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다”고 강조했다.

 

앵커요, 정치인 출신이니 얼마나 유창할까. 하지만 못하는 이야기가 많을 것이요, 분위기도 사뭇 딱딱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와 정치가 아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솔직히 낯설었다.
1981∼92년 KBS 9시 뉴스를 진행한 ‘앵커 신은경’은 서울 장충단성결교회 권사다. 남편 박성범 전 국회의원은 안수집사다. 모태신앙인 박 전의원과 결혼하면서부터 신씨는 본격적으로 믿음생활을 했다. 2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하는 중에 그는 여러 번 감사 고백을 했다.
또 깊이 고민하며 은혜 받은 성경구절을 들려줬다. 짧지만 찬양도 불렀다. 그래서 ‘신은경 권사’라고 부르나 보다. 가끔 눈시울을 붉히며 들려준 그의 신앙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주님을 만나다
58년 엄격한 유교 가정에서 2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나.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공무원이던 아버지 덕분에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당장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너희들을 알아서 키워줄 거야. 좋은 말씀 많이 듣고 바르게 커야 한다.” ‘하나님 어린이집’에 맡겨진 셈이다. 그때 처음 교회 문턱을 넘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KBS 아나운서에 합격한 뒤 바쁘게 생활하면서 교회와는 점점 멀어졌다.
95년 7월 당시 신한국당 중구지구당 위원장이었던 남편과 결혼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아나운서직을 버리고 영국 유학길에 오르며 대중을 떠났던 나는 그렇게 정치인의 아내로 다시 대중 앞에 섰다. 남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와 결혼하면서 다시 교회에 나갔다.
96년 15대 총선에 출마하는 남편을 위해 선거운동에 정신 없었다. 그런 중에 장충단성결교회에서 부활절 칸타타를 하는데, 내레이션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흔쾌히 수락했다.
시간은 흐르고 선거 직전 마지막 합동유세가 있는 날, 알고 보니 교회에서 부활절 칸타타를 하는 날과 겹친 게 아닌가. 이제 와 못한다고 할 수도 없고, 유세 현장에 안 갈 수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이내 결단을 내렸다. “하나님과 한 약속이 먼저다.”
남편의 유세 현장은 잊고 어느새 부활절 칸타타에 젖어들었다. 정말 한 편의 말씀을 보는 것 같았다. 특히 예수님의 수난 장면을 읽는 대목에서 그만 목이 메어왔다. ‘아, 예수님! 얼마나 아프세요?’ 목소리가 떨려왔다. 교인들도 함께 울었다.
나의 온 마음은 오로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다. 못 박힌 주님의 두 손이 나를 어루만지고 있음을 느꼈다. 온 몸이 뜨거워지면서 나는 그렇게 예수님을 만났다. 그날 우리 부부는 함께 승리했다.

시련은 쓰다
하지만 16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2004년 17대에서 남편은 어렵게 당선됐다. 기쁨도 잠시, 어머니가 췌장암 판정을 받고 1년간 투병하다 결국 2005년 7월 돌아가셨다. 슬퍼할 새도 없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터진 ‘한나라당 공천 비리’. 그 중심에 바로 내가 있었다. 당시 남편은 서울시 당위원장을 맡아 활동 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만나달라고 했다. 그때마다 거절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대가성 뇌물을 받았다며 연일 뉴스 1면을 장식했다. 달러가 수북이 담긴 상자를 받았네, 명품 8종 세트를 받았네, 케이크 상자를 받았네….
검찰에 수차례 불려다니며 진술했다.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해도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급기야 돈을 더 요구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말까지 나돌았다. 검찰에 나가는 건 두렵고 떨렸다.
성경을 꼭 안고 다니며 시편 말씀을 되뇌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머릿돌로 쓰임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2007년 4월 결국 우리 부부는 무혐의 판결을 받았고, 1년간의 지루한 공방을 끝냈다. 하지만 남편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공천받지 못했다. 나라도 남편을 대신해 지역 주민들의 평가를 받겠다며 선거에 나섰지만 패배했다. 솔직히 그 후유증은 컸다.

은혜는 달콤하다
딸아이의 공부를 핑계로 2년 동안 미국에 있었다. 결혼 후 12년 동안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아이를 제대로 돌볼 시간이 없었다. 모처럼 딸과 좋은 시간을 가졌다. 특히 딸과 함께 피아노를 치며 밤새워 부른 복음성가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는 지금도 나를 뛰게 만든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 성경공부 모임에 흠뻑 젖어들었다. 지난해 9월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어 이끌고 있다. CD로 만들어진 ‘어? 성경이 읽어지네!’를 밤새워 들으며 성경공부 강의를 준비한다. 하루는 저자인 이애실 사모님의 고백을 듣는데 그만 폭풍 눈물을 쏟고 말았다.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란 노래가 나와요. 야구선수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다는 메시지인데,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저의 고백과 다르지 않아요.”
강의를 준비하다 말고 무릎을 꿇고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울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면 저도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짐했다. 울림도 있었다. “네가 잘 모르면서 사람들 앞에 서면 안 되잖아. 지금은 부족한데,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면 안 되잖아.”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신 주님의 목소리였다. 그분은 “사랑하는 은경아, 제발 내 발밑에서 내 말 좀 들어라”고 붙잡아주셨다.

하프타임을 설계하다
우연히 ‘하프타임 세미나’에 참석했다. 후반기 인생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나를 점검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세미나에서 ‘인생 사명서’를 썼다. “방송, 강연, 집필. 이 세 가지를 통해 이 땅의 여성과 청소년, 직장인에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보자.”
기독교TV(CTS) ‘아름다운 세상’의 진행자로 다시 시청자 앞에 섰다. 또 극동방송을 통해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가 없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성경을 읽어주는 일이다. 지난 4월부터 열심히 이 사역에 매달리고 있다.
스피치 특강도 진행 중인데, 많은 분들이 감동이 있다고 말씀해주신다. 이달부터는 국민대 정치대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나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를 통해 우리 젊은이들이 귀하게 쓰임을 받기를 기도한다.
최근엔 스피치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책도 집필 중이다. 지금은 주님의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

인물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