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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쓴소리’ 잘하기로 유명했던 구봉서 장로는 “요즘 코미디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며 “잘못된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는 진실이 담긴 코미디를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웃는 게 습관이 돼서 문제가 될 때도 있어요. 상갓집에 가서도 웃으면서 인사해 가끔 말도 듣고 그래요. 집사람도 잘 웃어요. 목사님 설교를 들을 때도 내가 보면 별 것도 아닌데 혼자 낄낄대며 웃어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구봉서(85·예능교회) 장로는 영락없이 막둥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최근 서울 잠원동 자택에서 만난 구 장로는 허리통증과 관절염으로 몸놀림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의 수족 같은 부인이 곁에 있어 마냥 행복해 보였다.
구 장로는 1960년대 TV방송국 개국과 함께 안방극장에 진출, 비실이 고(故) 배삼룡, 후라이보이 고 곽규석씨와 콤비를 이루며 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구수한 입담과 풍자로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던 구봉서. 현재 그는 방송 활동을 접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다.

 

-몇 년 전까지는 기독교 관련 방송에서 간증을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사람은 시간이 더디 간다고 하는데 난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거 같아요. 요일에 맞춰 병원도 가야 하고, 주일엔 교회 가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요. 예배보고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점심 먹고. 애들까지 다 모이니까.
집에 들어오면 하루가 다 가요. 평일에는 가끔 친구들과 점심 먹으러 가든가 점심 먹자고 전화 오면 우리 집에서 다 모여요.
우리 집 앞에서 차를 타고 나가서 밥 먹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집에 들어오면 3시가 돼.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해요. 씻고 TV 보다 지루하면 책을 많이 봐요. 옛날 보던 책도 다시 보고. 주로 일본책을 봐요. 일본에서 아는 사람이 보내줘요.”
어린 시절 꿈이 서울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었다는 그는 지금도 일본문예잡지와 소설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전성기 때는 소재를 찾기 위해 늘 책을 읽어 공부하는 연예인으로도 알려졌다.
“일본강점기 때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한국어 책보다 일본어 책이 눈에 익어요. 그래서 일본책을 즐겨 봐요.”

 

-인기의 정점에서 독실한 ‘예수쟁이’로 변했다고 하는데 어떤 사건이 있었나요.
“하용조 목사님이 계속 전도하시고 부인이 열심히 교회 일을 하니까 안 나갈 수가 없었어요.”
사실 구 장로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주님을 구주로 모시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불혹의 나이인 40을 넘어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는 누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성경에 나오는 도마처럼 하나님을 보여 달라며 의심했다. 목사님의 설교는 자장가였고 여성도들의 기도는 남자보다 배가 더 길어 싫었다. 이제 끝나려나 싶으면 다시 “원하옵건대…”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거들었다.
“결혼할 때는 시어머님이 불교를 믿으셨어요. 4남2녀의 맏이라 맏며느리로 일 많이 했어요. 동생들 다 시집 장가보내고.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제게 시어머님은 결혼 전에는 종교는 자유라고 하셨어요. 결혼하니까 시어머님이 한 집에서 두 종교 가질 수 없다고 못 나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초하룻날 보름은 시어머님 따라 절에 가야 됐어요. 절에 가서 부처님 보면서 ‘주님 아시죠’ 하고 절했어요. 그런데 10년 만에 돌아오셨어요.
나도 예수 믿겠다고. 그리고 구씨네 집 대대로 불교인데 동생들 전부 장로, 권사 됐어요.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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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콤비로 활동했던 ‘비실이’배삼룡과 함께.

 

-전도는 어떻게 하셨어요.
“아이를 낳자 밖에 나갈 자유를 주셨어요. 그래서 조용히 영락교회를 다녔지요. 새벽에 시어머니는 안방에서 ‘관세음보살’ 하시고 건넌방에서 나는 ‘주여’ 기도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이겼죠. 승리했어요. 시어머님도 예수 믿으시고 봉사 많이 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안방에서 연예인 교회가 시작됐다는 건 뭔가요.
“하용조 목사님이 마포교회 중고등부 전도사님이었을 때 ‘웃으면 복이 와요’ 연출 김경태 장로가 그 교회 장로였어요. 부인이 마포교회 전도사인데 하루는 오셔서 성경공부 안 하겠냐고 했어요.
그때는 시어머님도 교회에 나가시고 믿을 때라 주일에만 교회를 다녀서 하겠다고 말하고 몇 사람이 모였어요. 제가 직접 지은 집이었는데 때마침 오일 파동으로 기름값이 너무 비싸 성경공부를 하는 안방만 난방을 했어요. 남편은 그때 다리를 다쳐 방 한쪽에 누워 잔다고 하더니 설교 말씀까지 다 듣기를 여러 번 했어요. 다리가 쉽게 낫지 않자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도중에 잠이 들었어요.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깨어나더니 사흘 뒤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기적이지요. 그러더니 곽규석씨 부부, 서수남 윤복희 정훈희 김자옥 고은아씨 등과 성경공부를 했어요. 74년 하나님을 영접했어요. 아마도 하나님이 쓰시려고 그랬겠지요.”
입소문이 나면서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사람이 40명을 넘고 안방에 다 앉을 수 없어 사무실을 얻었다. 76년 3월 7일 ‘연예인교회’의 창립예배를 드리고 지금은 이름을 바꾼 서울 평창동 예능교회를 섬기고 있다.

 

-영접 후 품었던 비전은 무엇입니까.
“봉사에요. 간증집회하면서 단에서 돌아가시겠다고 서원했어요. 간증 집회 다니며 받은 사례금을 모아서 아프리카 우간다에 학교를 지었어요. 고은아 권사가 우간다에 갔더니 ‘구봉서 학교’가 있어서 놀랐대요.
아이들이 ‘제가 학교 선생님이 됐어요’라는 등 테이프도 보내주고. 아프리카에 못 가본 게 아쉬워요. 신망애보육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년이 넘어요. 유니세프, 월드비전도 돕고 있어요.”

 

-젊은이나 후배들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매사에 최선을 다해라. 후배들에게는 웃기지 않는 대본으로 웃기려고 애쓰지 말라고 해요. 그냥 넘어가고 그 다음 코너에서 웃겨라. 지금은 제 말이 안 통할 거예요.
왜냐하면 옛날에는 길어서 여기서 안 웃기면 다음에 웃기면 됐는데 지금은 단발성이라 노상 웃겨야지. 나이든 사람을 배려하는 코미디도 만들어줬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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