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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가 기독교 찬송가로 작사돼 보급 유통됐을 가능성이 3일 제기됐다.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는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 스님)가 최근 미국 에모리 대학을 방문해 윤치호(1865-1945) 애국가 친필본 등 관련 기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현행 애국가 전문이 수록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1908)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윤치호 역술 찬미가는 에모리 대학의 윤치호 관련 스크랩물에 편철되어 있었으며, 융희 2년(1908년) 6월25일 발행된 재판 활자본으로. 발행자는 김상만, 발행소는 광학서포이다.

 흰색 표지에 가로 13㎝ 세로 18㎝ 크기이다. 

찬미가는 윤치호가 한영서원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치기 위해 1908년 역술해서 펴낸 노래집으로 15곡의 찬송가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14장에 현행 애국가가 실려 있다.
 
이중 12곡은 번역 가사이며 애국가 등 3곡은 창작인 것으로 알려졌다.

15쪽에 실린 애국가는 부제가 ‘애국적 찬송가(Patriotic hymn)’로 명시된 가운데 노래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춰 부르는 것으로 표기했다. 

현행 애국가는 해방 후 안익태(1906-1965)의 곡을 붙인 것이다.

1절의 ‘하나님이 보호하사(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대한 만세(우리 나라 만세)’, 2절의 ‘바람이슬 불변함은(바람서리 불변함은)’ 3절의 ‘구름없이 높고’(높고 구름없이), 4절의 ‘님군을 섬기며(충성을 다하여)’ 등을 제외하면 후렴구까지 모두 같다.

애국가가 기독교 복음주의와 애국심의 결합으로 탄생된 찬송가의 모습이라는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안창호(1878-1938)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흥사단측도 “1907년 안창호가 귀국 후 선천 예배당에서 금식기도 후 찬미가에서 시상을 얻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라는 애국가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가 심의 당시 거론된 최병헌 정동교회 목사. 

교회 음악가 김인식 등 애국가 작사와 관련된 모든 인물들이 기독교 복음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은 애국가가 초기에는 찬송가로 창작되고 수용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혜문 스님은 “애국가가 기독교 찬송가로 시작해 기미년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의 노래로 승화되는 과정은 작사가 규명에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특히 윤치호 역술 찬미가(1908)의 보급은 애국가 보급 확산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윤치호의 1945년 애국가 친필본에 이어 1908년 발행한 찬미가 속 애국가가 확인됨에 따라 더 이상의 작사자 논쟁은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를 비롯해 1925년 동아일보 기사 등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고 적시한 자료들은 수십 건에 달한다. 

심지어 조선총독부에 끌려가 재판까지 받은 윤치호의 공판 기록에도 애국가 작사자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이번 찬미가 속 애국가는 ‘윤치호 작사설’과는 무관하게 애국가가 특정 종교에 치우쳤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그간 애국가 1절에 나오는 ‘하느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이론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하느님이 천도교의 ‘한울님’, 혹은 하늘을 떠받드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을 이른다고 해석하지만 모두가 종교적 단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인은 물론, 종교가 없는 국민들까지 포용하기엔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현행 애국가가 작사자 윤치호의 친일 논란은 물론,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 활동 및 표절설까지 거론되온만큼 “차제에 통일 코리아를 염두에 둔 애국가 제정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뉴스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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