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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우병 시위가 최고조에 달한 2007년 6월 10일 에스더기도운동이 서울광장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있다. 밤에는 ‘대한민국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개최했다.


에스더기도운동은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40일 특별철야기도를 시작했다. 

6000여명의 기도자들은 서울 금란교회에서 대통령 선출과 복음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2008년 4월 MBC PD수첩이 광우병 문제를 보도했다. 


그때부터 광우병 사태가 전국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시위는 갈수록 격렬해졌다. 


광우병을 넘어서서 정권퇴진과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밤이 되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과 광화문 일대는 무법천지가 됐다. 


무대 위에선 욕설이 난무했다. “예수, 너도 광우병 걸려봐라. 지금 우리가 광우병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기독교 개독교” “이명박 장로를 안수해 준 목사들, 손모가지를 칼로 잘라라.” 


게다가 인터넷에는 ‘미국 소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난다’는 등 허황된 이야기가 난무했다. 


인터넷 조사기관에 따르면 4∼6월 다음 아고라 게시판의 글 가운데서 상위 10개 아이디가 2만2000건을 쓴 것으로 밝혀졌다. 


1%의 아이디가 쓴 글이 전체 32%를 차지했다. 당시 한 사람이 9개의 아이디를 쓸 수 있었다. 


결국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인터넷 선전·선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내용은 대부분 반국가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이었다.


당시 나는 경원대 무역학과 교수였다. 


수출입 전문가 사이에선 광우병이 미국 소가 아닌 유럽 소와 관련된 병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한번은 외국에서 미국 소에 대해 잘 아는 분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한국 사람들은 왜 치사하게 미국 소를 갖고 난리를 칩니까. 한국 사람들의 지식수준이 그것밖에 안 됩니까.” 


국제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잘못된 지식으로 국민을 선동하는 사람도,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도 문제였다. 


사실을 바르게 국민들에게 이해시키고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와 공권력도 문제였다. 


광우병 사태가 극렬해지면서 골방에서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6회에 걸쳐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에 나가 시위대 한가운데서 광장기도회를 드렸다.  


마지막 광장기도회는 6월 25일 국가기도회였다. 

에스더기도운동 초대 고문인 김준곤 목사님을 모시기로 했다. 


그러나 6월 말이 되도록 광우병 시위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김 목사님 측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교수님, 서울광장 6·25국가기도회를 취소해 주십시오. 잘못하면 김 목사님이 테러를 당할 수 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연락이 왔다.


 “김 목사님이 꼭 나가시겠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라도 6·25국가기도회를 취소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국가 위기 상황에서 기도회를 취소할 수는 없었다. 


85세 고령의 김 목사님께서 시위대 군중에 둘러싸인 채 무대에 등단하셨다. 


“저희 아버지는 6·25전쟁 때 제가 보는 앞에서 공산당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아내도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맞아 죽었습니다. 

공산당은 몽둥이와 돌로 저를 때린 뒤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 머리와 심장을 칼로 찔렀습니다. 

그리고 죽은 개처럼 저를 끌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기적 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김 목사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광우병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국가 걱정을 하면서 밤 11시에 시위 현장에 두 번 나왔습니다. 10대 소녀들이 밤늦게까지 시위를 하고 있길래 물어봤습니다. 

‘왜 이렇게 시위를 해?’ ‘모르세요? 우린 다 죽어요. 94%가 다 죽는다고 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을 좋아해서 미국에서 들여온 소 때문에 우리가 다 죽어요.’

 주변에는 증오가 꽉 차 있는 구호가 가득했습니다.”

<에스더기도운동 이용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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