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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 7월 말까지 국내 거주 외국인은 총 154만2211명에 달한다. 

이들 가운데 맞벌이 가정에 상주하는 중국동포 도우미, 회사 식당에서 서빙하는 아줌마, 건설현장 인부 등 주로 3D 업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52만여명(2013 안전행정통계연보). 

대한민국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잘 보이지 않는 그들이다. 

추석 명절을 앞둔 지금 주변의 그들에게 한번쯤 시선을 옮겨보는 건 어떨까.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들과 딸의 만남을 간절히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을... 

추석의 설렘 대신 외로움을 안고 있는 ‘조금 특별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0년 전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장미희(가명·26·여)씨. 지난 10일 기자와 만난 그는 북한 어투가 전혀 없는 표준어로 추석을 앞둔 자신의 심경을 담담하게 전했다. 

함북 청진이 고향인 장씨는 17세이던 2003년 어머니, 남동생과 북한 국경을 넘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중국에 갔던 어머니가 1년 만에 집에 돌아와 공부할 생각이 있다면 지금 북한을 떠나자고 했다. 

고등중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1년간 농사일과 집안일을 맡아온 장씨는 어머니와 헤어질 게 두려워 중국행을 결심했다. 

다만 할머니와 아버지는 예외였다. 
한국으로 오기까지 많이 힘들었다. 

죽음의 순간에 맞닥뜨리자 그는 한번도 부른 적 없던 하나님부터 찾았다. 

“어머니가 중국에 계신 동안 교회에 다니셔서 하나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믿지 않았었지요.” 

그러나 북한, 중국, 베트남을 거치는 위험하고도 긴 여정에서 그는 신앙의 ‘열혈투사’가 됐다. 
기도밖에는 두려움을 떨쳐낼 게 없었다.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이들의 도움으로 2005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장씨는 “하나님, 고맙습니다”를 외치며 엉엉 울었다. 

그는 장신대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며 틈틈이 일했다. 

하루 빨리 한국에 정착해 기초생활수급자 신세를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이렇듯 성공적으로 한국에 정착한 장씨지만 명절 때만 되면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온다. 
고향에 홀로 남겨진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가 많이 그리워도 연락할 수 없습니다. 

브로커를 통해 세 번 정도 연락드리고 생활비를 보내드렸는데 통화가 도청돼 아버지께 안전원이 다녀갔대요. 첫 통화 때 제 목소리를 못 알아듣고 ‘처녀, 누구냐’하던 아버지가 대화 중 딸인걸 알고 30분간 흐느껴 우셨는데….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돕니다.” 

올 추석에도 장씨는 임진각을 방문한다. 이곳에 북한이탈주민과 이산가족을 위한 합동 차례가 마련돼서다. 

아버지를 위해 차례상에 술을 올린다는 그는 언젠가 통일이 돼 다시 한번 고향에 가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북한 문호가 개방될 거라는 희망을 항상 품고 있어요. 
만약 그런 날이 오면 새벽에 출발해 황해도에 갔다가 다시 집에 올 수 있겠지요. 
그날이 속히 오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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