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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영국 소설가 그레엄 그린이 쓴 ‘권력과 영광’이란 소설이 자꾸 떠오른다. 


한국이나 미주 한인교계에도 목회자의 일탈에서 비롯되는 불미스러운 소문들이 수그러들지 않고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신학교라 해서 ‘어머니 감신’이라고 부르는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도 한 교수와 밑에서 논문 지도를 받던 여학생과의 부적절한 성관계가 폭로되면서 신학교의 체면을 구기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다. 


어디 거기 뿐인가?


 탈선과 부정으로 물의를 일으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부끄러운 목회자 얼굴들은 수도 없이 많다.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전도의 문을 막는 대표주자들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다.


감리교 신학교에 다닐 때 읽은 이 소설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아니 깊은 영혼의 메아리였다. 


늘 다시 읽고 싶어지는 소설 목록 중 하나였다. 권력과 영광이란 말은 주기도문에서 따 온 말이라고 한다. 


“권세(Power)와 영광(Glory)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라고 마침표를 찍는 주기도문.

소설에는 ‘위스키 신부(Father Whisky)’가 주인공으로 나온다.물론 별명이다. 


위스키가 없으면 살수 없는 알콜 중독자라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와 대립되는 또 하나의 인물은 경위. 그러니까 공권력을 쥔 경위가 정치를 상징한다면 신부는 종교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가능하여 정치와 종교의 단순대립으로 몰아갈 수 있지만 그게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위스키 신부의 내면을 파고 든다.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 멕시코. 카톨릭 사제들을 향한 인민들의 존경심을 빼앗기 위해 종교의 씨를 말려야 된다고 생각한 혁명정부는 신부들을 총살하거나 억지 결혼을 시켜 현실과 타협하게 만드는 때였다.


위스키 신부는 요즘말로 하면 ‘걸레’였다. 


배고픈 개가 입에 물고 있는 뼈다귀의 살점을 빼앗기 위해 그 개와 싸우기도 하는 속물이었다.

자신의 비겁하고 타락한 모습을 괴로워하면서도 사생아로 낳은 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다. 


살벌한 군사혁명으로 인해 모든 사제들이 체포되는 와중에도 운 좋게 살아남아 도망을 다니면서도 누군가에게 계속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한다. 


그는 교회 박해가 없는 멕시코의 다른 주로 몰래 도망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살 수 있는 길이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카톨릭을 몰아내는 것이 국가를 위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믿고 있던 경위는 위스키 사제를 체포하기 위한 면밀한 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도피생활을 마치고 카톨릭 탄압을 피할 수 있는 주 경계선이 가까웠을 때였다. 


3일 후면 보더라인을 넘어 자유와 희망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런데 한 혼혈인이 나타나 누군가가 죽어 가고 있는데 장례 성례식을 치러줄 사제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 사람은 위스키 신부를 유인하여 당국에 넘겨주고 현상금을 받겠다는 계략을 짜고 접근한 사람이었다. 


위스키 신부는 이 순간 갈등하기 시작한다. 


속는 줄 알면서도 자기를 필요로 하는 죽어가는 영혼을 찾아가서 성례를 베풀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게 죽음의 길이요, 


함정의 길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죽어가는 한 영혼을 위하여 보더라인을 뒤로하고 장례장소로 향하는 위스키 신부. 


남은 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귀 끄는 사람도 보내버리고 혼자서 그는 장례장소로 향했다. 다음 순간 잠복해 있던 경찰들에게 여지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날 밤 총살을 당해 그의 생애는 막을 내렸다.


그는 구제불능, 타락한 신부였다. 그냥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약하고 형편없는 주의 종이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한 영혼이 신부를 찾는 다는 말에는 마음을 닫을 수 없었다. 


비록 위스키 신부로 살아왔지만 마음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마지막 인생을 걸고 싶었다.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했다. 오히려 두려움이 없이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독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수난을 당하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밤새 고뇌하며 기도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이 잔을 내게서 돌려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인간적 유혹을 쉽게 이겨내지 못한 한 신부의 기이한 순교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타락과 순교는 사실 종이 한장 차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는데 우리시대의 목회자들에게 왜 유혹이 없겠는가? 


나도 여신도와 불륜에 빠져 사생아를 낳을 수도 있고, 교회 돈을 횡령하여 내 통장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기꾼이 될 수도 있고, 명예를 위해서라면 후안무치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게 인간의 한계요 실존이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인간적 연약함은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불신앙의 DNA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늘 영적 자기경성이 요구된다. 자기 의를 꺾기위해 매일 새벽예배에서 엎드리고, 눈물로 회개하며 몸부림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목회자의 일탈이 반복되는 요즈음 그레엄 그린의 위스키 신부가 생각나는 이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우리의 선택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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