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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 목사>

 

지난 2월 26일 개최된 제84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은 지구촌의 축제요 미국의 자존심이란 말이 그런대로 공감이 가는 이벤트였다.
누군가는 아카데미 시상식은 세계 문화의 축제요, 인류의 비전을 보는 곳이라고까지 말한다. 우선 미국과 정치적으로는 철천지 원수관계로 발전되고 있는 이란에서 만든 ‘작별(A Separation)’이란 영화가 외국영화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정치의 바운더리를 극복하는 아카데미의 넓은 가슴을 느끼게 해준다.
무성 흑백영화 ‘더 아티스트’가 배경은 옛날 옛적 할리웃이지만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모두 휩쓸었다. 모두가 프랑스 사람들이다.
할리웃의 쟁쟁한 배우들이 Made in France에게 모두 양보한 셈이 되었다. 할리웃이 실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텃세 포기하고 미리 꼬리를 내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공평해서 좋아 보였다.
화약약품 공격을 받아 징그러운 화상을 얼굴에 달고 살아가는 100여명의 불쌍한 파키스탄 여성들에게 한 성형 외과의사가 무료로 시술해 주는 휴먼 드라마 ‘세이빙 페이스’가 다큐멘타리 부문에서 상을 받아 여성 감독이 트로피를 받게 되었는데 “변화를 갈망하는 모든 파키스탄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는 그의 수상발언은 나에게도 감동을 주었다.
캐톨릭과 개신교와의 갈등이 잠재되어 있는 북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전쟁 때문에 헤어진 두 친구가 오랜만에 화해하는 줄거리의 ‘더 쇼어(The Shore)’가 단편영화 부문에서 상을 받은 것도 좋아 보였다.
멀리 북 아일랜드의 아픔도 결코 무심하게 넘어가지 않으려는 아카데미의 오지랍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죽은 북한의 김정일까지 등장해서 이번 아카데미의 화제꺼리는 더욱 풍부했다. 영국 코메디 배우 사챠 배론 코헨이란 자가 중동의 독재자 복장을 하고 2명의 여성 보디가드와 함께 김정일의 유골함을 들고 나타나 레드카펫 위에 밀가루를 뿌려대는 바람에 아카데미 워스트(Worst)의 한 장면으로 찍혔지만 오는 5월 개봉 예정인 자신의 영화 ‘독재자’ 홍보 퍼포먼스를 위한 속 보이는 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내 눈에 비친 베스트는 남우조연상을 받은 크리스토퍼 플러머였다. ‘비기너스’란 영화로 조연상을 받은 것이다.
조연상이 문제가 아니라 플러머란 어떤 배우인가? 우리가 보고 자란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를 기억하시는가? ‘에델바이스’란 노래 때문에 더 유명해진 영화, 그 영화에서 마리아로 나오는 쥴리 앤드류스와 사랑에 빠지는 오스트리아의 본 트랍 예비역 대령이 바로 크리스토퍼 플러머다.
일곱 자녀들을 스파르타식으로 군기 잡는 그 잘 생긴 미남 군인이 세월이 흐르고 흘러 82세의 노인네가 되어 아카데미에 나타난 것이다. 그 영화를 수십번 보았거늘 플러머가 저렇게 늙은 얼굴이 되어 있을 줄이야! 세월이 그렇게 빠르단 말인가?
그가 젊고 싱싱한 배우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하게 조연상을 받게 되었다니! 금년이 아카데미 84주년이니 그는 아카데미보다 2년 어린 나이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82세하면 관속에 있을 사람으로 여기는 게 하나의 풍조가 되고 있다.
한국에선 한때 ‘사오정(사오십 대에 정년퇴직한 사람)’이란 말이 유행하다가 요즘엔 ‘오륙도’란 말이 대세라고 한다. “50대, 60대에도 은퇴하지 않는 사람은 도둑놈”이란 뜻이라고 한다나? 그럼 82세에 여전히 현역배우로서 아카데미 상을 타는 배우라면 도둑놈 수준이 아니라 살인강도라고 불러야 할까? 한국은 나이만 들면 내쫓지 못해 환장한 사회 같다.
하도 나라가 아이돌이니 걸 그룹이니 해서 중고등학교 학생 나이의 연예인들에게 뿅하고 이성을 잃은 나라이니까 50대가 되어도 나이든 어른이라고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인 모양이다.
그러나 방송에서 보자. ‘인터뷰의 귀재’라는 바바라 월터스는 금년 82세다. 늙었다고 ABC-TV에서 푸대접하고 있는가? 지금도 방송을 진행하면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금년 79세의 래리 킹은 2년 전 까지 CNN의 간판 ‘래리 킹 라이브’를 생방송으로 진행한 적이 있다. CBS-TV의 간판스타인 데이빗 레터맨은 금년 65세다. 한국에서라면 은퇴하고 수락산 등산길을 수천 번 씩 오르내렸을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신바람이 나서 매일 밤 미국을 웃기고 있다.
어른을 어른으로 존중해 주는 경노사상은 일반 사회는 물론이요 직업 현장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도덕성이다. 미국의 연방 예산 삭감으로 존경받아야 할 교육계에 찬바람 분지가 오래다. LA 통합 교육구에서도 많은 선생님들이 눈물을 머금고 해고당하는 신세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은퇴를 앞둔 오래 된 고참을 짜르면 그 사람 월급으로 신참 둘을 쓸 수 있는 간단한 수학 이론에도 불구하고 고참을 짜르지 않고 신참 선생님 둘을 해고하는 게 이 나라의 고용 윤리다. 그만큼 시니어리티를 존중하는 사회란 것이다. 이론보다도 경험과 실제를 더 높이 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좀 들었다하면 원로 목사로 일단 처치(?)하려고만 애쓰지 그분의 경륜을 높이 사서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려는 경노사상은 온데 간데 없는 경우가 많다.
실력 없고 목회도 제대로 못하는 신참들이 툭하면 나이든 고참 목사 타령이나 한다. 후배들에게 물려 줄 생각안하고 그냥 자리만 차고 있다고 구시렁거린다. 선배 목사 내쫓는데 열심이던 목사들은 더 불행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꼴을 나는 많이 보았다.
사실 세상적이라면 가장 세상적인 아카데미에서 조차 경노사상을 가지고 80세 고령의 배우에게 상을 주어 업적을 격려한다면 교회는 보이지 않는 영적 업적을 늘 사실보다 더 과대평가하여 존경하고 추앙해야 마땅한 격려 공동체가 아니던가?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조연상 수상을 보면서 뜬금없이 경노사상이 머릿속에 자리 잡는 이유는 나도 늙은이 편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다는 증거인가?  
<크리스천뉴스위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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