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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 목사>

 

선교회가 많아도 너무 많다. 개체 교회 안에 바울 선교회, 루디아 선교회, 갈렙 선교회 등 수많은 선교회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교회밖에 존재하는 선교회 중에는 한국에 본부를 두고 지부라고 나타나는 선교회도 많고 타주에 본부를 둔 선교회들도 무작정 LA로 밀고 들어가면 건질게 있다는 식으로 여기저기 사무실을 차리고 있다.
사무실은 고사하고 노트북 하나 들고 다니며 무슨 무슨 선교회 한다고 영상자료, 보도자료 등을 들고 다니며 얼굴 알리기에 열을 올리는 꼴을 많이 목격한다.
도대체 대표가 누구이고 감독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무슨 목적으로 태어났는지도 아리송한 선교회들이 툭하면 호텔에서 기금모금을 한다며 집회를 연다.
선교회라면 무조건 주님의 거룩한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라고 믿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별로 의심하는 눈치도 없이 도와주지 못해 안달인 경우가 많다.
선교회란 이름을 붙여가지고 다니는데 봐도 못 본 척했다가는 천벌 받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몇 사람이 모여 그냥 선교회라고 간판을 붙이고 나면 자신들의 행위는 거룩한 것이고 이곳저곳에다 손을 벌려 돈을 받아내도 절대로 죄송하거나 불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이름만 들어도 좀 황당하다고 생각되는 선교회도 많다. 선교 대상을 분명하게 밝히는 경우도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좋은 낱말로 선교회를 단장하는 경우도 많아서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무슨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선교하겠다는 사명 선언도 어정쩡한 경우도 있다.
이러다가는 무슨 저승사자 선교회, 용왕나라 선교회, 달나라 선교회, 팔공 보살 선교회 같은 게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미얀마 선교사라고 하면서 그 곳엔 얼굴 내민 적도 없이 LA에서 선교 헌금만 모금하러 다닌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북한 선교사라고 하면서 북한 실정은 제대로 모른 채 덮어놓고 돈이나 내라고 떼를 쓴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LA에서 마땅히 할 일은 없고 백수로 살기엔 너무 허무해서 이젠 선교사가 되어 살기로 결단했다는 간증 몇 번하고 다니다가 그럴듯한 이름으로 선교회 작명을 끝내고 명함을 파서 돌리고 다닌다면 그 선교회의 투명성과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
반드시 있어야 할 선교회, 주님께서 기뻐하실 선교회들이 많은 것은 확실하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적으로 선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들에게 혹시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몹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불경기 때문에  늘어나는 노숙자와 장애인들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살피려고 그들에게 다가서는 많은 선교회 활동을 취재하고 보도하노라면 가슴 뭉클한 사연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선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가 모금활동이 시원치 않으면 그냥 노점상 리아카 접듯이 ‘아니면 말고’ 식의 선교회가 너무 많은 것을 고발하고 싶은 것이다.
은혜 받았다고 대책 없이 선교회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사업 실패한 뒤 실패 인생 면피용으로 선교회를 창립하겠다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한국에서 유명했으니 LA서도 문만 열어 놓으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안일주의도 위험한 발상이다. LA가 어디 아사리판인 줄 아는가?  
대개 자신들의 정체불명을 단칼에 포장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큰 교회 목회자나 은퇴 후에도 왕성하게 활동을 멈추지 못하시는 명성 있는 목사님들을 후원회장이나 이사회장으로 모셔드리는 일이다.
그러면 그 분들의 이름석자 때문에 투명성은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선교회 모금활동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지만 모금한 돈을 어디에 썼다고 공개적으로 재정을 보고하는 선교회는 많이 보지 못했다.
따라서 여기저기 이름이 오르내리는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어느 선교회 이사장이나 후원회장을 수락할 경우 그 선교회가 우리 커뮤니티에 미칠 긍정적 효과에만 점수를 주지 말고 오히려 그 선교회가 하나님 나라선교를 가로막는 부정적 역기능으로 작용할 경우 그 막중한 책임의 무게도 염두에 두어야 마땅하다.
기독교의 역사는 사실 파견의 역사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파견하셔서 지금도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성자 하나님의 요청에 의해 성령 하나님이 이 땅에 파견되어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제자들은 위탁받은 사명을 안고 도마는 오늘의 인도에까지 가서, 야고보는 당시의 ‘땅 끝’ 스페인에, 그리고 바울은 죽음을 무릎 쓰고 로마에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는 파견의 역사인 것이다.
매주일 예배 피날레를 장식하는 축도는 세상을 향해 나가는 우리들을 세워놓고 당부하시는 주님의 파견용 멘트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나가서 일주일 동안 살아갈 때 기죽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라는 파견 선언문이다.
우리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파견병답게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확실한 선교사로 살아 갈수 있다면 사실 그리 많은 선교회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
선교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별해야 되는 세상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오염되고 있다는 증거인가?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너나 할 것 없이 가끔은 필요한 질문이 이것이다. “너는 진짜냐? 아니면 가짜냐?”
<크리스천뉴스위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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