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gif

<조명환 목사>

 

미국의 어린이들에게 프로 농구 NBA 스타들은 우상에 가깝다. 수억대의 연봉을 받는 찬란한 돈벌이 직업이란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농구 뿐 아니라 대부분의 스포츠 스타들은 이 나라 어린이들의 ‘아이돌’이다.
그런데 아이스하키를 빼고는 스포츠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는 선수들 대부분은 흑인, 혹은 혼혈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NFL 필라델피아 스틸러스에서 은퇴를 선언한 하인즈 워드 선수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혼혈인이다. 지난 주말 플로리다에서 열린 PGA 아놀드 팔머 인비테이셔날 대회에서 2년의 슬럼프를 깨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 타이거 우즈도 혼혈인이다. 그가 북 아일랜드 맥도웰 선수를 누르고 마지막 라운드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순간 구름같이 몰려 있던 갤러리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하늘이 무너질 듯 환호성을 질렀다. 갤러리들은 대부분 백인들이었다.
NBA를 보자. ‘린새니티’ 열풍을 몰고 왔던 제레미 린은 우리처럼 아시안계다. 지난해 NBA 챔피언이었던 달라스 매브릭스의 노비츠키는 독일계다. 흔하지 않게 아시안이나 백인 선수 몇 명을 빼고는 NBA는 흑인 선수들이 ‘점령’하고 있다.
금년에 우승을 노리는 오클라호마 시티 썬더의 간판은 케빈 듀란트, 웨스트브룩, 모두 흑인들이다. 블랙 맘바 레이커스의 간판 코비 브라이언트를 비롯 월드 피스, 앤드류 바이넘, 모두 흑인들이다. 금년 초반 화제의 팀으로 떠올랐던 LA 클리퍼스의 블레이크 그리핀은 덩크 슛의 천재다. 우리가 ‘한국 차’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기아 자동차의 광고 모델이다. 그가 기아 자동차 TV 광고를 통해 야릇한 미소를 내게 날리는 날은 왠지 모르게 그날 기분이 좋아진다. 클리퍼스가 끌어들인 수퍼스타 크리스 폴의 활약은 얼마나 대단한가?
‘큰 형님’ 격인 레이커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주는 클리퍼스의 신나는 포인트 가드인 그도 역시 흑인이다. 마이애미 히트의 삼총사 르브론 제임스, 크리스 바쉬, 드웨인 웨이드도 모두가 흑인이다. 금년 우승을 벼르고 있는 시카고 불스의 데렉 로즈도 흑인이다. 그는 지난해 MVP였다. 뉴욕 닉스의 카멜로 앤소니, 올랜도 매직의 드와잇 하워드, 보스톤 셀틱스의 론도, 알랜, 피어스, 그리고 가넷 모두가 흑인이다.
구지 스포츠를 말할게 아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누구인가? 피부색으로 따지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흑인 대통령이다.
그런데 아무리 백인 우월주의자라 해도 흑인 대통령의 통치가 싫다고 백인 공화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 보았는가? 없다. NBA가 모두 흑인선수 일색이라며 NBA는 완전 사절, 대신 백인이 좋아서 아이스하키만 보겠다는 사람이라면 병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오히려 이 나라 국민들은 스포츠 뿐 만 아니라 음악, 영화 등 예능 분야에서 흑인들이 창조해 내는 다양한 문화 예술의 수혜자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다보면 흑백을 구별할 겨를도 없이 칼라 블라인드가 되어 더불어 사는 삶으로 체질이 굳어져야 마땅하다.
물론 모든 인종들에겐 타 인종을 거부하는 본능적 인종 차별주의는 존재한다. 아무래도 백인이나 흑인 보다는 아시안이 편하고 아시안 중에서도 한국인이면 더욱 마음 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생리적 기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다민족 사회에 살면서 타인종을 존중해 주고 그들의 문화와 특별한 생활전통을 존중해 주는 것은 이민자의 기본예의다. 인도 식당에서 새어나오는 지독한 카레 냄새를 불평하면서 한국 식당에 나가 청국장을 편하게 즐기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이슬람 여인들이 머리를 가리고 다니는 ‘히잡’을 보고 여성을 비하하는 저급 종교의 빨래거리라고 비웃어준다면 한복을 입고 나선 여인들을 보고 저건 미개한 나라의 화류계 옷이라고 비아냥을 대면 어쩔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카레도 좋고 청국장도 좋고, 히잡도 좋고 바지 저고리도 좋으니 그냥 어울려 함께 살 것을 작심하고 건국된 나라다.
시민권 선서할 때 영어로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지만 그러나 이것 한 가지, 이 나라에 살면서 나는 칼라 블라인드, 즉 인종, 피부색에는 색맹으로 살겠다는 마음속의 서약은 단단히 하고 시작해야 그 다음이 순탄하다.
지금 플로리다에서 일어난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의 죽음은 인종 갈등의 뿌리 깊은 심지에 다시 불이 붙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히스패닉 자율 방범대원이 비무장 소년에게 총을 쏜 것이다. 그는 정당방위라고 변명하고 어딘가로 숨어 버렸지만 그 소년이 흑인에다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라며 흑인사회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아직도 이 나라엔 백인우월주의가 군데군데 지뢰처럼 숨어 있다. “이게 니네 나라야!, 너희들은 아메리칸 인디언들 쫓아내고 주인행세 하고 있지만 너희들 조상님들은 사실 강도들이었어!” 그렇게 소리쳐도 소용은 없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잘못 밟으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게 지뢰밭이다. 그래서 인종간의 문제는 서로 서로 존중, 미리 미리 예방 밖에 없다.
‘4. 29 폭동’이 어디 예고편 보여주고 일어났는가? 로드니 킹이 결코 잘한 것은 아니었지만 백인 하이웨이 패트롤의 한참 오버한 그 방망이 질이 그토록 참혹한 흑인 폭동으로 벌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4. 29 폭동 20주년이 다음 달로 다가왔다. 흑인이라면 소스라치게 싫어하고 히스패닉이라면 우선 내리 깔아 뭉개는 인종편견에는 여전히 의지적인 수정작업이 필요하다.
NBA 흑인 스타들 때문에 한 계절을 즐겁게 살면서도 흑인 며느리는 안된다고 언성을 높이는 내 모습을 보면 한인 1세들의 비열한 두 얼굴이 느껴진다. TV에 나오는 흑인은 OK지만 생활 속의 흑인은 ‘노 댕큐’라는 이중적 인간성부터 개조되어야 인종 전시장의 나라에서 우리는 평화를 담보 받아 살아 갈 수 있으리라.
그래서 색맹으로 살아야 무진 행복한 나라, 그게 우리들의 아메리카 . . .     
<크리스천뉴스위크 발행인>

기획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