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gif

<조명환 목사>

 

당연한 일이 너무 부당한 것들에 가려서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여린 모습이 아니겠는가?
한국 감리교가 감독회장 선거 파행을 겪으면서 지난 4년여 동안 고소, 고발로 얼룩진 ‘고소 감리교’ ‘법정 싸움 감리교’로 그 위상이 끝도 없이 추락해 온 것을 이쪽에서도 오랫동안 답답하게 목격해 왔다.
참 해도 너무 한다고 한마디 쓴 소리를 뱉아 주고 싶었던 그 감리교에서 느닷없이 교단 헌법인 장정을 개정하겠다며 그 골자는 목회자 세습방지를 입법화하는 것이라고 밝히니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느냐며 심지어 ‘조중동’ 언론까지 달려들어 취재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당연한 일에 놀라워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것들에 길들여져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세습-01.jpg


그 참에 장정 개정 위원장은 무슨 중세시대에 떠오른 마틴 루터라도 되는 것처럼 일반 사회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참으로 씁쓸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맴돌았다.
우선 훌륭한 발상이다. 교회 밖에서는 목회자 세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수도 없이 떠들었지만 막상 교단 법으로 이를 저지하겠다는 것은 감리교가 처음이라고 한다.
입법 내용을 살펴보면 목회자 가족끼리 교회를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사회 전반의 정서를 반영하듯 부모와 자녀가 연속해서 한 교회의 담임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의 담임자 파송제한 조항을 신설한다는 것이다.
또 담임목사의 사위나 며느리 등 가족들도 세습할 수 없도록 했고, 부모가 장로로 있는 교회에서도 그 자녀가 담임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나 장인이 힘 쎈(?) 목회자가 아니면 아무리 실력과 영성, 미국에서의 학벌이 어쩌고 해도 한국에선 시골교회로 내 몰리는 게 모두가 상식처럼 눈치 채고 있는 교회의 현실이다.
미주 한인교회에서 이리저리 작은 교회를 맴돌다가도 갑자기 한국 대형교회로 뜨는 목사를 보면 대개 아버지와 장인이 그 뒤에 버티고 있다.
그런데 더 노골적으로 ‘쓰리 쿠션’ 같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 편법조차도 아예 거두절미하고 아버지나 장인교회를 물려받아 다이렉트로 금의환향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이를 지켜보는 동료 목회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물론이고 과연 교회가 이래도 되는가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그래서 목회자 세습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지난 8월초에 다녀온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동부유럽 여행은 신성로마 제국의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제국의 황제가 쓰는 금빛 찬란한 왕관에는 어김없이 금빛 찬란한 십자가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시대의 십자가는 구원이나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의 상징이었다.
특히 짤스부르크의 대주교였던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살로메란 여인과 불륜을 맺어 그 여인과 15명의 자녀들을 위해 거대한 미라벨 궁전과 정원을 만들어 주었다는 소설 같은 사실은 그 시대를 두고 왜 암흑의 시대, ‘다크 에이지’였다고 말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우리 한국 기독교가 그 시대를 모방하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모독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목회자 대물림이란 것은 그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교회의 배타주의, 이기주의, 물질중심주의의 한 단면이란 지적에는 별 이의가 없을 듯하다.
캐톨릭 교회도 그 화려한 권력과 물질을 대물림하면 교회의 타락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에 애시당초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전통으로 못 박아 놓지 않았을까?
감리교가 장정 개정을 통하여 그동안의 추락된 이미지를 회복시키고 세습 폐단을 막아서는 개신교 최초의 개혁 교단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될 수 있다면 여기서도 아낌없는 성원의 갈채를 보내고 싶은 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런데 장정 개정위원회의 이같은 입법 움직임이 정작 이 교단의 최고 의결기관인 입법의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는 9월 중순 예정인 입법의회에서 이 거대한(?) 개혁과 변화의 몸부림이 과연 받아들여 질수 있을까?
만약 무산된다면 추락하는 감리교의 날개에 시한폭탄을 달아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크리스찬위클리 발행인>

기획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