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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우리 곁은 떠나가신 김수철 목사님,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날 LA 한인타운 웨스턴 길에 있는 한 작은 일식당에서 점심을 나누면서 내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괜찮은거지?
내가 힘내라고 사주는 점심이니 우리 먹고 힘내자고!”


 특히 생선회를 좋아했던 김 목사님과 함께 나눈 그날의 오찬이 목사님과 나눈 마지막 식사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님, 너무 빨리 떠나셨습니다.


작별인사를 나눈 후 차를 행해 절뚝거리며 걸어가던 뒷모습이 마음에 걸리긴 했어도 그냥 차츰 좋아지겠지 생각만 하다가 이렇게 갑작스런 별세 소식을 접하게 되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과 나는 학연도 없습니다.
목사님은 서울 신학대학을 나오셨습니다.


지연도 없습니다.
목사님은 인천 송도가 고향이니까요.


다만 같은 웨슬리의 후예라는 것 하나로 만났지만 목사님과 가슴을 열고 주고 받은 사연들이 적지 않습니다.


2003년도 내가 크리스천 위클리(당시 이름은 크리스천 뉴스위크)란 주간신문을 처음 시작하고 첫 사업으로 개최한 제1회 세계 웨슬리언 지도자대회 때 LA 다운타운 하이야트 호텔에서 새벽예배를 시작해야 하는데 피아노 반주자를 찾지 못해 안절 부절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급하게 내 전화를 받은 목사님이 피아노를 잘 치던 딸아이를 흔들어 깨워 호텔로 데리고 오는 바람에 새벽예배를 무사히 드릴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그 따님이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패사디나에 있는 감리교 예배당을 찾아 갔을 때 그날 목사님은 함박 웃음 뿐이었습니다.


웃으면 금방 눈은 없어지고 칼자국만 남는 목사님의 그 너그러운 미소가 그날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


길바닥에서 밤을 지샌 노숙자들에겐 더운 음식을 줘야 된다는 것이 사역의 원칙이었던 목사님이 책을 냈습니다.


‘담요와 스프’란 책이었습니다. 출판 기념회에서 사회를 봐달라고 해서 사회를 본 기억도 납니다.
겨울이 오면 노숙자를 덮어줄 담요, 그들의 추운 몸을 덥혀줄 스프를 끓여주기 위해 늘 후원자 타령을 하셨던 목사님은 2007년 금융위기 이후 교회들의 후원이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하자 입에 붙은 것이 후원자, 후원자였습니다.


늘 부족한 후원금 이 목사님을 우울하게 했습니다.


2009년 여름 서울에 나갔을 때 신촌 로타리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서울역 근처에 서울시가 후원하는 노숙자 센터를 마련하게 되었다며 기뻐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거리 선교회가 센터를 마련하고 노숙자들의 직업훈련을 도와서 그들이 자랑스럽게 사회로 복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게 바로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라고 고백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거리 선교회를 ‘소중한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바꾸면서 저들도 하나님의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열변을 토하며 보통사람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들을 한없는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던 김 목사님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많은 LA 다운타운의 노숙자들은 김 목사님의 별세 소식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서울역 지하도에서 신문지를 이불삼아 잠을 자고 일어난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국그릇을 건네며 주님의 사랑까지 전파했던 김 목사님의 안타까운 별세 소식을 그들은 알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뿌린 긍휼사역의 씨앗들이 민들레 꽃씨처럼 도심 여기저기 떨어져 어디선가 크고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잎을 피우고 어쩌면 열매도 익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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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 하나님은 보고 계실 것입니다.


이제 누가 어둡고 냄새나는 다운타운 슬럼가 골목길에 더운 국 냄비를 준비해 놓고 새벽마다 노숙자들의 시린 가슴을 덮혀 주나요?


하나님은 필요한 일꾼을 불러 그 자리에 세워주실 것입니다.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고, 담요와 스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주님의 나라에서 안식하소서.
노숙자들에게 담요를 덮어주던 김 목사님에게 그 분은 이제 영원한 평강의 담요를 덮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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