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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수 목사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

위대한 리더십을 발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열정에 불타오르는 사람들이다. 

평범을 뛰어 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의식 내부에는 열정의 불꽃이 타오른다.

인권을 향한 간디의 열정을 생각해 보라. 평등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몸부림친 마틴 루터 킹의 열정, 테크놀로지를 향한 빌게이츠의 열정,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 열정적으로 좇아 간 바울 등,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열정의 사람이었다. 열정의 사람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헌신적인 대가를 치루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에도 열정은 꼭 필요하다. 

초기 교회 신부였던 아타나시오스는 세상 전부가 그를 적대시한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이런 열정적인 말을 남기었다. 

“그러면 이제 나 아타나시오스는 세상을 적대하겠소.” 루터가 로마 카톨릭과 대항하여 그 서슬퍼런 권력 앞에서 그는 불타오르는 열정에 움직여 이렇게 외쳤다. 

“나는 온 세상에 대항하여 바로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리더는 열정의 사람이어야 한다. 

리더는 열정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 열정의 한말, 그 열정의 바디 랭귀지를 보면서 사람들은 감화되고 설득되어진다. 
리더가 무언가 열정으로 그 영혼을 불태울 때 불가능한 것들을 극복하게 된다. 

마음속의 불은 삶의 모든 것을 끌어 올린다. 

그러기에 열정적인 리더는 유능하다.

열정적인 리더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늘 감동을 준다. 

열정적인 리더가 될 때 헌신적이며 생산적인 사람이 된다.
한번은 영화 ‘완전한 폭풍우(Perfect Storm)’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망망대해에서 커다란 빌딩의 크기와 같은 엄청난 폭풍우가 엄습한다. 

그렇지만 열정의 뱃사람은 그 폭풍우를 맞이하여 끝까지 포기치 않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워 나간다. 

죽음의 사투 끝에 마침내 그 공포의 폭풍우를 뱃사람의 열정으로 극복해 나간다. 

그 뱃사람의 열정을 보며 나도 그 열정의 열기가 전염되는 것을 느꼈다. 

때때로 열정은 좋은 영화를 보면서 피어오르기도 한다.

열정의 사람들을 만나면 왠지 열정이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열정의 예술가, 열정의 감독, 열정의 스포츠맨, 열정의 설교자, 열정의 예술인,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삶을 지켜 보면서 열정의 삶을 배우기도 한다. 

그들은 열정을 삶의 연료로 공급받기에 그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열정을 소유한 사람들을 접할 때 우리는 그 열정으로 전염된다.

영적인 리더가 가지는 열정은 세상의 리더와는 완연히 다른 면이 있다. 
그것은 열정의 근원과 에너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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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에 사로잡힐 때 평범한 사람들이 힘과 에너지로 가득 찬 열정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기드온은 압도적인 숫자의 대적 세력을 물리친다.
느헤미야는 단시일 내에 예루살렘 성을 쌓아 올린다.

에훗은 왼손잡이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적의 왕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평범하고 미숙한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열정이 충만할 때 그들은 세상 안에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 나갔다. 

위험을 무릎 쓰기도 하였고,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우리를 숨차게 만드는 기준들을 넘어 나갔다. 

피곤에 지친, 탈진에 젖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찾아 왔을 때 돌연 생기가 넘쳐 나며 비전을 갖게 되고 능력이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은 열정의 근본 에너지이다.

매일 매일 아침을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루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시작하라.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을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므로 삶에 환희를 느끼는 날로 바꾸라.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식어가는 삶의 열정을 회복하라. 

하나님과 교제를 놓치는 않은 사람, 하나님과 관계를 날마다 세워 나가는 사람은 날마다 새로운 하늘의 열정을 공급 받는다. 

진정한 리더가 되고 싶은가? 

자신의 일과 삶, 그리고 사역의 열정 지수를 평가해 보라.

<아틀란타연합감리교회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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