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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Q :  저는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성경을 보면 “용서하라 불쌍히 여겨라”는 말씀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친구랑 싸우지도 못하고 화도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성경에 맞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성경 읽는 것이 두렵습니다. 

제가 취할 태도는 어떤 것일까요.


A  :  용서하라, 불쌍히 여겨라, 사랑하라는 말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긍정적 명령들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복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두들겨 패라, 피터지게 싸워라,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하지 마라, 불쌍히 여기지 말고 닥치는 대로 짓밟아라, 날마다 24시간 화를 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쪽이 실천하기가 쉬울까요?

어느 날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할까요?”

 주님의 대답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였습니다. 
유대인의 경우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철저하게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은 죄를 50퍼센트는 남겨두신 채 시도 때도 없이 “너는 아직도 죄가 남았다 네 죄를 알렸다”라며 다그친다면 그것은 사죄의 은총이 아닙니다. 

완전히 완벽하게 용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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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과 구속의 실천이며 현존입니다. 

“용서한다, 용서해야 된다, 용서하고 싶다”는 것은 십자가 정신이며 구현입니다. 

우리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고 찬송할 수 있는 것도 십자가의 희생에 감격했기 때문이며 죄 사함받은 감격을 누리는 사람들만 누리는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사하라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는 것만큼이나 용서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교회도 걸핏하면 분쟁에 휘말리고 고소, 고발, 무고, 악플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용서의 상징인 십자가 아래에서 말입니다. 

“황언자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차라리 이리떼 속에 사는 것이 낫다”라는 말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용서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 구원의 감격을 품고 사는 사람만 가능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증오와 반목, 시기와 질투, 대결과 갈등, 원한과 복수의 악성 바이러스가 폭발하는 세상에서 용서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삶을 선택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용서는 강자와 승자의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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