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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수 목사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

내가 사는 아틀란타는 11월 초경이면 언제나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가 곳곳에 펼쳐진다. 
따로 단풍 구경을 가지 않아도 바로 내가 다니는 그곳이 다 단풍의 절경을 이룬다.

단풍이 떨어지는 거리를 운전하고 다니면 절로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감사란 늘 내 주변의 일어나는 작은 일로 시작하는 감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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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마다 눈을 뜰 때 감사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세상에는 오늘 아침만 해도 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내가 숨쉬고 오늘도 이렇게 걷고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매일 매일 살아 있음, 그것만도 기적이다. 
요즘 한국의 텔레비전을 보면 건강을 챙기는 프로그램이 홍수를 이룬다. 
그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노라면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아픈 사람도 많고 병에 대한 지식이 가득한지.... 
병들의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고맙지만 그런 건강 경보에 숨이 막힌다. 
그렇지만 오늘 나는 여전히 숨쉬고 여전히 달리고 있다. 

미국을 살면서 환경이 쾌적해서 그런지 모두가 장수하시는 것 같다. 
80세, 90세를 살아도 여전히 건강한 몸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어르신네들을 보면서 아멘, 아멘이다.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정신적인 상처나 비극의 와중 가운데도 감사를 드리는 분들이 있다. 
9.11사태나 미국을 한 때 덮쳤던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극을 당한 사람들이 인터뷰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참혹한 역경 가운데도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전천후 감사 인생들을 보게 된다. 

부정한 감정이나 결과 가운데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성숙한 모습을 보며 어떻게 그러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경이롭기만 하다. 

시련의 시기에 감사하는 마음은 단순한 긍정적인 사고나 행복의 기술로는 부족하다. 

삶의 최악의 순간 속에서도 인생의 밝은 면을 발견하는 심오한 감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얼마 전 미국 템파에 살고 있는 내 친구 하나가 암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미국에 와서 내가 목회하는 것을 알고 끊임없이 내게 전화하며 카톡도 날리던 친구이다. 

목회를 하는 나를 마치 자기 담임 목사와 같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그런 친구가 불의의 암으로 지난 1년간 투병을 하다가 지난 몇 주전 세상을 마감했다. 
죽기 몇 달 전부터 자기의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하루 건너서 전화를 했다. 

그러면서 그 지독한 암의 통증과의 사투 가운데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했다.
자기가 다시 인생을 살게 되면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 복음 전도를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의 꺼져가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지켜 보며 아련해 지는 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감사, 은혜, 영광을 끝까지 언급하다가 그렇게 허허롭게 떠나 버렸다. 

그 친구의 다른 그 무엇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다만 감사의 메시지가 나의 마음을 친다. 

사랑하는 내 친구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대신 감사하기로 인생을 선택하였다. 
그렇다. 

감사란 선택이다, 감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자세이다.
우리는 감사를 고를 수 있다. 

또 불평을 선택할 수도 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불유쾌한 소식 가운데 감사를 택할 수 있다. 

비난을 당해서 마음이 쓰릴지라도 감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지독한 질병의 고통 가운데도 내가 임종을 지켜 본 교인들 중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며 하나님의 품에 안긴 성도들이 적지 않다. 

감사의 선택은 피 눈물나는 노력과 희생의 산물이다. 

매일 묵상과 기도, 침상에서의 회고의 삶 속에서 내가 감사라는 선물의 수혜자임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삶이다. 

내 힘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살아갔음을 고백한다.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의 노고와 도움을 의지하며 살고 있음을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 감사하는 인생이 아닐까? 

감사의 인생, 그것은 빈약한 내 인생의 모습을 하나님의 은혜로 포장하여 인생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삶이다. 

그 감사가 나를 살린다. 

그리고 그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 일으킨다.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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