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JPG

‘무늬만 선교사’가 너무 많다.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기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부르기 쉽게 선교사라고 불러도 괜찮은 것일까? 

그런 식이면 찜질방에 가서 열심히 예수를 전파하는 이를 두고 ‘찜찔방 선교사’, 골프장에서도 혹시나 전도가 될지 모르니까 일주일에 한번 정도 골프 안하면 좀 쑤시는 신자는 골프 선교사, 얼마 동안 노래방 안가면 유행가 다 까먹는 줄 걱정하면서 인생을 유행가 반, 찬송가 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노래방 선교사, 아프다는 사람 있으면 자기 침 한방이면 해결 안 되는 병이 없다고 소리치는 한의사는 한방 선교사, 예수 믿는 식당 주방장은 주방장 선교사, 예수 믿는 미용사는 미용 선교사, 되는 대로 모두 선교사라고 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실 선교사 되기 위해 자격증 따는 일도 없고 예수님 전파하자는데 자격증이고 뭐고를 따지는 것도 그렇고 적당한 전도의지가 있으면 무조건 선교사라고 부르면 이 세상은 온통 선교사 천지가 될 것이다.

선교사란 사도라는 말처럼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복음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자. 그러니까 선교사는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며 복음을 전하러 가야할 선교지가 있는 자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이방인이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사의 사명이라면 어디 경계를 정해 놓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해외에 나가서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나 LA 한인타운 올림픽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나 똑같이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라고 할 수는 있다. 

그래서 엘렌 화이트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교회가 보내지도 않았고 선교지도 없는데 자기 스스로 선교사라면 이상하지 않은가? 

더구나 목사가 목회가 시원치 않으면 선교사, 선교사가 시원치 않으면 목사로 왔다리 갔다리 변신하는 것도 ‘수상한 선교사’로 보여 진다.

멕시코 티화나는 LA와 운전으로 2시간 거리다. 

샌디에고와 마주 보고 있는 이 국경도시는 한인들도 이웃 드나들 듯 하는 곳이다. 

그러나 티화나와 샌디에고, 미국과 멕시코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난다. 

우선 가난한 것이 금방 표가 난다. 

티화나에 들어서면 냄새부터가 고약하다. 

창문을 열수가 없을 정도다.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 가서 복음과 함께 빵을 건네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긍휼사역은 참으로 권장할 만 하다. 

지난 주말 멕시코 방문길에서 나는 이 나라는 아직도 ‘복음이 빵이고 빵이 복음’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주일학교 예배를 드리면서도 과자봉지를 들고 설교해야 한다. 

잘 집중하는 어린이들에겐 과자를 준다. 

배고픈 아이들은 그 과자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듣고 대답해야 한다. 

주일학교 어린이 교실이 그렇다면 다른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공급해 주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예수가 들어서기를 기대하며 다가서는 빵의 복음. . .

그 방법이 오히려 멕시코에서는 더욱 절실한 선교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현재 티화나 지역엔 한인 선교사가 약 6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분들의 사역을 통해 배고픈 자들이 덜 굶주리고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통한 영생의 진리가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무늬만 선교사지 멕시코 선교사 명함만 가지고 다니며 멕시코는 관광 삼아 드나들고 미국에서는 선교사라고 모금활동을 벌여서 겨우 자기 하나 ‘멕시코 여행비’ 챙기는 것으로 끝나는 선교사들이 너무 많다고 들었다.

물론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정부마저 돌보지 않는 고아들을 모아서 학교에 보내고 지체장애, 정신장애자들을 돌보며 예수를 통해 새 희망을 심어주는 훌륭한 선교사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반 살고 멕시코에서 반 살고, 반은 선교사 반은 관광객, 반은 복음전도 반은 여가활용, 이런 식의 한가한 선교사가 많아서 미국에서 멕시코를 위한 모금활동은 많아지는데 그 중엔 석연치 않은 모금활동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파송한 적도 없고 선교 성과를 보고할 곳도 없는 ‘자가 선교사’는 점점 많아지는 것이 멕시코 선교현장의 현실. 

물론 자비량 선교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실 무늬만 선교사 문제가 어디 멕시코 뿐이겠는가? 

지금은 비즈니스 선교사도 많아 졌다고 들었다. 

처음부터 신분을 속이고 비즈니스맨으로 접근해서 회교 국가 등에 침투하여 개인적인 관계를 통하여 점점 그리스도를 주입시켜 나가는 비즈니스 선교. 

그게 어느 특정지역에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선교사란 직분이 자기 하나 건사하는 생계 수단이라면 선교사란 이름 석자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이름이다.

사실 LA에도 이름만 선교사지 어디서 무슨 일로 선교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유령 선교사가 하도 많으니 멕시코 선교현장만 꼬집을 일도 아닌 것 같다.

땀 흘리고 눈물 뿌리며 선교현장에서 헌신적으로 씨름하고 있는 선교사님들 가슴에 혹시 상처를 주는 말처럼 들리지 않을까 글을 쓰면서도 개운치가 않지만 덮어놓고 선교사라며 어영부영 놀러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지적은 효과적인 선교 미래를 위해 짚고 넘어가야 옳을 것 같다.

<크리스찬위클리발행인>

기획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