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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수 목사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

히브리서 10장에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라는 말씀처럼 교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곳이 있을까? 

교회는 사랑과 선행의 공동체이다. 

그러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계속 해서 격려하는 곳이 교회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랑으로 격려하기보다도 서로 깎아 내리려고 분주한 곳이다. 

서로 돌아보기 보다는 서로를 폄하하고 시기하기에 바쁘다. 

정죄와 비난이 난무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사랑의 격려를 받기 보다는 상처 받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떠한 일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 교회라는 공동체에 이러한 세속적인 모습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교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바른 인식이 결여된 탓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 주는 섬김의 공동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진정 발을 씻어 주는 겸손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리더들이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목회자가 되고 장로가 되면 갑자기 권력이라도 잡을 줄로 착각하는 세속적이며 세상적인 사고관 때문이 아닐까? 

교회를 재단 이사회 정도로 오해하고 갑자기 자기가 이사가 되었다고 잘못된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다. 

그래서 군림하려고 들고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려고 한다.

교회가 과연 그러한 곳일까? 교회란 지배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섬김의 정신을 내면화하는 곳이다. 

교회란 격려하므로 남을 받아들이고 용기를 주는 곳이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낮춤으로 겸손을 생활화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처럼 독특한 공동체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성령이란 단어는 보혜사, 우리를 돕는 자, 위로자로 번역하기도 한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역이다. 

성령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 곁에 서서 격려를 주신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신다. 

흠이 많은 죄인들인 우리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고무시킨다. 

교회는 이 위로의 성령, 격려의 성령님이 머무시고 임재하시기에 마땅히 격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목회를 해 오면서 두 가지 종류의 교인들과 대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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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율법주의적 자세를 가진 교인들이다. 

그들은 엄격한 공의를 행사하는 것 같지만 늘 자신을 의롭다고 간주한다. 
형제를 비판하며 심판하기를 좋아한다. 

이 율법주의적 교인들은 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침소봉대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짐을 무겁게 하고 좌절시키고 위축시킨다.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사는 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고통과 좌절에 빠져 사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고 위로해 준다. 
그들에게는 깊은 이해심이 있고 용서와 감싸줌이 있다. 

그들에게는 권면이 있고 기도와 격려의 포옹이 있다. 

바나바와 같은 교인들이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사막길과 같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 

더구나 이민의 삶이란 더구나 불같은 광야의 여정길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자주 넘어진다. 

이러한 때에 격려의 리더들은 교인들을 부축하고 업어 주며 힘을 보태주며 같이 생을 걸어가게는 도우미가 된다. 

그 분들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들의 삶은 절망 가운데 소망적이며 좌절 가운데 용기를 얻게 된다.
오늘날 이민 교회에는 이러한 격려의 사역자와 동반자들이 훨씬 더 많아야 한다. 

정죄와 비판의 차가운 눈초리로 다른 교인들에게 상처와 시험을 주는 그런 율법주의적 교인들은 결국 교회를 실추케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 주신 것은 쓰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서로 붙잡고 의지하며 격려하며 든든히 세워 주심을 위함이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도록 하자!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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