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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할리웃에서 출연료가 가장 비싼 배우라고 한다. 

지난 해 6월 ‘피플’지는 시방 세계를 변화시키는 15명의 여성가운데 안젤리나 졸리를 첫 번째로 꼽았다. 

아무리 영화배우를 넘어서서 그가 유니세프 친선대사, 난민 특사 등으로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 후한 점수를 준다고 해도 세계를 변화시키는 여성 1위?

버킹엄 궁전엔 여왕님도 계시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이나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오프라 윈프리 같은 거물들을 제치고 그가 세계 1위라고? 

나는 피플지가 무슨 뇌물을 먹었나? 라며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개봉된 그의 영화 ‘언브로큰(Unbroken)’을 보고난 후 나는 피플 지에 선뜻 동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할리웃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그가 허름한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채 터키의 시리아 난민촌에 찾아들어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난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모습은 이미 감동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영화다. 

졸리가 이번에 영화감독이 된 것이다. 

그의 감독 데뷔작품이 바로 ‘언브로큰’이다. 

잘 만든 영화였다. 제목이 말해주듯 전쟁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부서질 수 없는’ 인간승리를 그려낸 것 또한 A+였다.

이 영화 때문에 화가 난 일본은 졸리의 일본 입국을 불허한다고 선언했다. 

일본에 발 디딜 생각을 말라는 엄포였다. 

그런 일본의 쪼잔한 행동으로 쫄게 없는 안젤리나 졸리는 영화를 넘어 이제는 세계가 지켜보는 거대한 인도주의자로 우뚝 서고 있는 게 아닌가?

 졸리의 잘 만든 영화가 소개해준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를 만나게 된 것은 더욱 큰 감동이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미국의 육상선수 루이 잠페리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잠페리니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5000m 대표로 참가한 육상대표 선수.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3살 때 남가주 토렌스로 이사 와서 살았다. 

영어는 서툴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 그는 악동이 되어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런데 잘하는 게 있었다. 

달리기였다. 

토렌스 고등학교의 달리기 선수로 뽑혀 드디어 1934년 LA 메모리얼 콜로시엄에서 열린 전미 고교육상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 기록을 경신하는 바람에 USC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를린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가 된 것이다.

올림픽이 끝난 후 발발한 2차 대전에 미국의 육군 항공대(미국 공군의 전신)에 입대하여 B-24 폭격기를 조종하며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던 그는 임무수행도중 비행기가 피격되어 태평양 한가운데 추락후 망망대해에 버려졌다. 

무려 47일 동안이나 바다에 표류하며 악전고투하던 모습이 몇 년 전 발표된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연상케 했다. 

천신만고 끝에 마샬 군도 부근에서 구조되긴 했으나 재수 없게도 일본군이었다. 

결국 도쿄 포로수용소로 압송되었다. 

1945년 8월 일본군이 항복할 때까지 2년여 간 잠페리니와 미국의 전쟁포로들은 가혹한 구타와 고문, 모욕과 살해 협박을 견뎌야 했다.

종전과 함께 모진 고통을 이겨내고 극적으로 생환한 잠페리니는 영웅이 됐다.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전통의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 레이스는 대회 이름을 '잠페리니 메모리얼 마일'로 명명했고, 남가주 토렌스 공항은 '잠페리니 필드'로 개명했다. 

모교 토렌스 고교의 대운동장은 '잠페리니 스타디움'으로, USC 육상스타디움은 '루이 잠페리니 플라자'가 됐다. 숱한 상과 훈장, 명예학위도 뒤따랐다.

그러나 잠페리니를 구원한 것은 그런 명예가 아니었다. 

일본군에 대한 복수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였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자유의 몸이 된 후 4년 만에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래함 목사의 감화를 통해 증오와 복수의 지옥 같은 늪에서 헤쳐 나올 수 있었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다.

후일 그는 이렇게 썼다. 

“용서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지만 그 용서가 바로 치유다. 진짜 치유는 용서다." 

그는 1950년 일본 선교팀의 일원이 되어 자신을 짐승처럼 취급했던 악랄했던 일본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갔다.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악연들을 복음으로 용서했다고 한다.

 그를 그토록 학대했던 수용소의 일본군 간수 와타나베 때문에 나를 포함하여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치를 떠는 것 같았다. 

‘버드(Bird)’란 별명으로 통하던 그 와타나베를 용서하기 위해 잠페리니는 그를 찾았다. 

그러나 끝내 버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7월 2일 그의 자택에서 1남1녀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으로 숨졌다. 
향년 97세였다.

‘언브로큰’은 결국 용서를 통해 완성된다는 잠페리니의 대서사시가 새해를 맞이하는 나에게 ‘용서’란 키워드를 선물한 셈이다. 

너그럽게 용서하며 살자.
<크리스찬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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