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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봉대 목사
<국제성서박물관장>


예루살렘 주민들이 평소에는 기혼샘의 물을 뜨러 성 밖으로 나날 수 있었지만, 전쟁이 나면 성문을 잠그고 항전해야 했기 때문에 성 밖에 있는 기혼샘의 물을 안전하게 성 안으로 끌어들여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유다 왕 히스기야는 성 밖의 기혼샘을 적들이 알아볼 수 없게 덮어 버리고, 기혼샘에서 실로암 연못에 이르는 견고한 지하수로를 뚫음으로써 물을 안전하게 확보하였던 것이다.      

  1838년 미국의 성서지리학자 로빈슨(Robinson)이 처음으로 기혼샘에서부터 좁은 터널을 따라 실로암까지 탐사하였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 영국의 워렌(Warren)도 `히스기야 터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탐사하였는데, 이때 기혼샘의 터널 안쪽에서 땅위를 향해 수직으로 뚫려 있는 갱도(Warren's shaft)를 발견하였는데, 히스기야가 터널을 만들기 전에 예루살렘 주민들이 성 안에서 기혼샘의 물을 뜰 수 있는 있는 우물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워렌은 다윗이 이 갱도를 통해 몰래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여부스 족속이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자랑했던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1880년 여름 어느 날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식히고 있던 아이들 중 하나가 물이 흘러나오는 지하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6m 정도 들어갔을 때 그 아이는 터널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벽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발견된 실로암 비문은 고대 히브리어로 모두 여섯 줄에 2백자가 적혀 있는데,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던 사람들이 중간에서 함께 만나게 된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3 규빗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 
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을 흘러나왔다.”

규빗(Cubit)은 고대 근동에서 사용하던 길이의 척도로 어른의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를 말한다. 

지하 터널의 실제 길이를 재니 525m였다. 

그래서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던 1규빗이 오늘날 대략 45cm정도 되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히스기야 터널은 고대 이스라엘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난공사였다. 

길이 5백25m인 지하 터널의 기울기는 0.06%로 기혼샘과 실로암 연못의 고저 차이가 고작 32㎝였다. 

이는 당시의 토목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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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앗수르 왕 산헤립은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영국의 대영제국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6각형으로 된 산헤립의 원통형 비문(Sanherib cylinder)에 보면, 산헤립의 유다 침공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히스기야가 항복하고 조공을 바침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어쨌든 앗수르로 돌아간 산헤립은 이사야의 예언(사 37:7)대로 쿠데타를 당해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실로암 비문은 발견된 지 10년 후인 1890년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한 그리스인이 터널로 들어가 이 비문을 떼어내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점에 비문 조각들을 팔아 넘겼는데, 소문을 접한 오스만 터키 당국이 이 유물을 압수하여 이스탄불의 제국박물관으로 운송됐으며, 현재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터키 정부에 실로암 비문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박물관 바깥뜰에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유적들이 여럿 있는 것을 보았다. 

박물관 밖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유적들에 새겨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스탄불이 과거 1천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꽃피웠던 곳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홈페이지: 
www.istanbularkeoloji.gov.tr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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