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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박물관 하면 흔히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르는 런던의 영국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그리고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을 꼽는다. 


영국 박물관의 얼굴마담은 이집트 최고 통치자였던 람세스 2세의 동상이라면 루브르 박물관의 얼굴마담은 모나리자일 것이다. 


그럼 바티칸에는? 


거기가면 그리스, 로마 시대 조각과 그림들이 즐비하지만 정작 명작은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벽화나 천장화일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역시 미켈란젤로의 삐에타,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숨진 예수님의 시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비통해 하는 순간을 조각한 ‘비탄’이란 뜻의 삐에타는 당연히 세계명작 반열에 올라있다.


그러나 그 3대 박물관을 넘보는 또 하나의 박물관이 우리 동네에 있다. 

LA에 있는 폴 게티 뮤지엄, 즉 ‘게티 센터’가 그것이다. 


LA 관광객 중에는 할리웃이나 디즈닐랜드를 찾는 사람도 많지만 폴 게티 뮤지엄을 먼저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근사한 일이다.


폴 게티에는 모네와 마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진품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얼굴마담은 빈센트 반 고흐의 아이리스다. 


고흐는 해바라기도 많이 그렸지만 아이리스도 많이 그렸다. 


우리말로는 ‘붓꽃’이라 부르는 그 보라색 꽃에서 고흐는 많은 안식을 얻었다고 전해진다.건축가 리차드 마이어가 설계한 이 게티센터는 13억을 들여 405 프리웨이 옆 산타모니카 산자락 전망 좋은 언덕위에 지어졌다. 


1997년 개장된 후 매년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여길 찾는다.


게티 센터가 특히 환영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입장이 공짜라는 점이다. 


브리티시 뮤지엄은 영국의 자존심을 말해주듯 입장이 공짜이지만 꼬박꼬박 입장료를 지불하고 루부르를 입장할 때는 어딘까 짠돌이 프랑스가 느껴진다. 


그래서 폴 게티로 손님을 모시고 갈 때 공짜 입장이 주는 행복까지 선물해 주고 있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문화자존심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무료 그림감상 잘 했으니 돈 많은 부자가 자선사업 한번 잘했다 생각하고 나올 때는 “댕큐 베리 마치, 폴 게티!” 그런 후한 점수를 주며 사람들은 박물관을 빠져 나올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박물관을 세상에 남겨놓고 간 폴 게티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댕큐 베리 마치’란 감사의 인사를 받을 만큼 너그러운 인간이었는가?


절대 아니다. 살아생전에 그는 악명의 대명사였다. 돈은 많았지만 악덕 기업주였다. 


미네소타에서 태어난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석유를 사다 장사를 해서 떼부자가 되었다. 


대공황이후 미국의 최대부자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게티 석유회사’를 차려서 1950년대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부자 1위로 등극했으니 지금의 빌게이츠 같은 존재였다. 


1966년 세계 최고부자로 기네스북에 오르긴 했지만 방탕한 사생활로 5번이나 결혼하여 14명의 손자를 두고 있었다.


1973년 이 부자에게도 불행한 일이 닥쳐왔다. 


이탈리아 마피아에 의해 친손자 납치사건이 로마에서 터진 것이다. 


손자 게티3세는 당시 16세. 


납치범들은 몸값으로 1700만 달러를 요구했다. 


당시 엄청난 몸값이긴 했지만 할아버지 록펠러에겐 껌 값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폴 게티는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딱 잡아떼고 나왔다.


 한번 몸값을 주기 시작하면 나머지 13명의 손자들이 모두 납치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못 본 척 한 것이다.


화가 난 납치범들은 손자의 귀를 칼로 떼어 메일로 보내는 잔혹성을 보이자 마침내 폴 게티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저 주는 게 아니었다. 


손자를 구출하기 위해 돈을 쓰되 아들이 연4%의 이자를 쳐서 나중에 갚는다는 조건을 내 걸었다.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고부자가 아들과 손자에게 이렇게 지독할 수 있단 말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전노였다.


억만장자였던 폴 게티는 자기 집에 찾아오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장거리 전화를 거는 비용이 아까워 집안에 동전을 넣어야 걸 수 있는 유료전화기를 설치해 놓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재물에 대한 이런 병적인 집착과 함께 그는 미술품에 대한 집착이 광적이었다고 한다. 


유명하다 싶으면 모두 사들이는 미술품 수집광이었다. 그래서 LA 말리부 근처 퍼시픽 팰리세이드에 있는 자신의 저택 ‘게티빌라’를 확장해 전시공간을 만들고 이를 1974년부터 일반에 무료로 개방했다. 


1976년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게티빌라와 그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을 게티재단에 기증했고 재단은 게티빌라와 별도로 게티센터를 현재의 자리에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게티센터가 그토록 돈에 집착하던 폴 게티의 인생 반성문으로 탄생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구두쇠로 살다가 죽을 때는 좋은 일 하고 죽자고 미리 계획된 인생 시나리오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위대한 선물임에는 틀림없다.


최근 개봉된 그에 관한 영화 '올 더 머니 인 더 월드(All the Money in the World)'는 드라마틱한 그의 생애를 스릴 넘치게 조명해 주고 있다.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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