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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세 살 난 어린아이가 원숭이 우리 안으로 떨어져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동물원 관리자가 신속하게 그 원숭이를 사살함으로 어린아이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이 사건을 두고 불쌍한 고릴라가 죽었다고 페이스 북과 트위터에서는 지금 난리가 났다. 


원숭이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무게 450파운드의 하람비란 이름을 가진 이 고릴라가 어린아이를 진짜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 개스 총을 쏴서 기절을 시키면 될 것을 왜 사살까지 했느냐는 주장, 희귀종 고릴라를 그렇게 없애는 것은 동물원 측의 무책임한 대응이었다고 화를 내는 사람, 어린아이를 그렇게 위험하게 만든 부모의 부주의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등 고릴라 편드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것이다. 


어린아이 생명에 대한 다행스런 눈길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에선 이 기사를 읽고 이런 댓글이 붙기도 했다. 


“자기 아이가 만약 그 고릴라 우리 안으로 빠졌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구경꾼 맘보를 가지고 아주 지랄을 떠네요.”


물론 짐승의 목숨도 중요하다. 고릴라를 죽이지 않고도 그 어린아이를 살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엉겁결에 누구나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어린아이를 키워본 엄마들은 누구나 안다. 

순간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릴라에게 총을 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동물원 측의 처사가 백번 옳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짐승의 목숨도 보호받아야 하지만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지난해 아프리카 짐바베 국립공원 외곽에서 ‘세실’이란 호랑이를 총으로 쐈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고 죽사발이 된 월터 팔머란 치과의사가 있다. 


그의 취미는 사냥이었고 국립공원 밖에서 합법적으로 사냥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호랑이를 죽였다는 이유로 아내와 딸까지 살해위협을 받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디즈니에서 만들어내는 많은 만화 영화 중에는 동물들을 의인화하여 인간성을 그들에게 투영시켜 재미 혹은 영웅적인 스토리를 짜내 대박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라이언 킹’이 그런 영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사자들을 ‘무파사’인줄 착각 한다. 그러나 사자에게 사람은 여전히 먹이감이다. 


우둔한 고양이와 꾀많은 생쥐가 등장하는 ‘톰 앤 제리’란 만화영화도 그렇다. 

생쥐가 사람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생쥐는 박테리아를 옮기는 더러운 포유동물일 뿐이다. 얼른 ‘올킨’을 불러 박멸해야 한다. 


사람들이 그런 만화영화에 세뇌되었기 때문일까? 


짐승을 사람인줄 착각하고 있는지 너무 과하게 짐승 편을 든다.


구약의 모리아 산을 우리 시대 가운데로 끌어내 보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오른 산이 모리아산이다. 거기서 만약 이삭을 죽였다면 패륜범죄자로 붙잡혀 아브라함은 쇠고랑을 찼을 것이다. 그런데 이삭이 아닌 옆에 있던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다. 


왜 죄 없는 양을 잡았냐고 트위터에서 비난의 소리가 봇물을 이루었으리라. 


“아들 목숨은 귀하고 양의 목숨은 귀하지 않냐? 동물학대범으로 당장 감옥에 보내라” 그런 피켓 들고 시위대가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약과다. 역대하에 보면 다윗은 수송아지 1천, 수양 1천, 어린양 1천을 잡아 번제를 드리기도 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1천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일천+번제(a thousand burnt offerings)였는지, 아니면 일천+번+제(thousand times offerings)였는지는 학자마다 해석이 다르다. 대개 일천 마리의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를 단 한 번 드렸다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번제가 무엇인가? 짐승을 태워 드리는 제사다. 


그렇다면 다윗이나 솔로몬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다른 별나라로 이민을 떠났어야 했을 것이다.


온라인상에서 하람비를 죽이게 만든 그 어린아이의 어머니를 범죄자로 수사하라는 청원 서명자가 33만 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숫자다. 왜 놀라운가? 


지난해 백인경찰에 의해 사살된 12세 흑인소년 타미 라이스의 억울한 죽음을 수사하라는 청원 서명자는 33만 명의 반도 미치지 못했던 사실을 비교해 보면 미국은 지금 ‘이상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고릴라를 위한 정의는 살아있고 억울하게 죽은 흑인 소년을 위한 정의는 어디다 팔아먹었는가?

‘이상한 나라’ 꼴이 어디 거기 뿐인가? 


흑백 인종차별제도를 철폐하고 흑인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해 남북전쟁까지 불사했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공화당에서 집요하게 멕시컨을 미워하면서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의 이민자들을 못살게 굴겠다고 벼르고 있는 자가 그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것을 보면 이상한 나라 증후군을 쉽게 읽게 해 준다.


어디 캐나다 이민 길을 찾아보는 것도 그렇고 이상하게 돌아가는 이 나라를 참 어찌할지 모르겠다.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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