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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봉대 목사
<국제성서박물관장>


묘원을 방문하기 전에 먼저 영상을 통해 선교사들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은 교육적 효과가 매우 높았다. 

영상을 통해 이미 마음의 감동을 받은 우리는 묘원에서 묘비에 쓰인 선교사들의 이름을 대할 때 마치 가까운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친숙함을 느낄 수 있었고, 자원봉사자가 설명하는 내용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1893년 10월 24일에 설립이 허가되었으며, 현재 한국 기독교 초기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의 근대화에 헌신한 구미 각국의 인사 500 여명이 묻혀 있으며, 최초의 피장 선교사는 존 헤론이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들은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을 병행하였다. 

선교사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고, 헤론, 스크랜톤 등이 일을 하였다. 

헤론 선교사는 1885년 내한하여 의료 선교사역을 하던 중 5년만에 이질에 걸려 순직하여 이 땅에 뼈를 묻었다.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헤론 선교사의 신앙고백이 적혀 있다.  

  헤론 선교사가 순직했을 당시 사대문 안에 외국인 묘지를 만들 수 없다고 하여 사대문 밖에 위치한 양화진에 묘를 만들게 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양화진이 위치한 마포나루는 한양 성내로 들어오는 목구멍과 같아서 한국을 자기 조국보다 더 사랑하고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원으로 갖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양화진에는 윌리암 쇼 선교사 부부와 아들 등, 여러 세대가 함께 묻힌 선교사 가족묘들도 있으며, 비문을 통해 선교사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한국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윌리엄 쇼 선교사는 우리나라 군목제도 창설에 기여한 감리교 선교사로 1921년 한국에 들어와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20년 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쇼 선교사는 해방 직후 1947년 다시 선교사로 들어와 주한미군 군목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군에 군목제도 창설을 이끌었다. 

그의 아들 해밀턴은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하던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서울 녹번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다.

  H. B. 헐버트의 비문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쓰여 있어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로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위대한 불씨로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이끌어낸 주역인 하디 목사님의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도 볼 수 있었다. 
올해가 원산부흥운동 110주년으로 한국감리교회에서 하디 목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활발하게 하고 있어서 더욱 반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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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의 기도


양화진을 방문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는데, 아펜젤러 목사 추모비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감리교 선교사로 1885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역을 하면서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을 세우고, 한국어 성경번역 작업에도 헌신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44세가 되던 해에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타고 가던 배가 일본 배와 충돌해 바다에 순직하였다. 

아펜젤러 추모비에는 그가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하여 드린 첫 기도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홈페이지(www.yanghwajin.net)를 통해 방문예약을 할 수 있다(전화문의: 02-332-9174)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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