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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 대한 감리회 장로들이 지난주 강원도 홍천에서 영성수련회를 연 자리에서 ‘공명선거 문화캠페인 실천선언’을 채택하고 ‘장로 선언문’도 발표했다고 한다. 


내용을 대충 살폈더니 감리교가 감독선거 때문에 난파직전에 몰려 있다고 판단하고 돈 봉투가 오가는 부정선거를 뿌리 뽑겠다는 결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단의 실타래같이 엉켜있는 모든 소송사태를 종결하고 교단헌법인 ‘교리와 장정’ 안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지 툭하면 소송 중독증 환자처럼 세상 법정으로 고소장 들고 달려가는 자는 자진해서 감리교에서 보따리 싸가지고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장로님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까? 


국회의원 선거판에도 막걸리, 고무신짝이 사라진지가 까마득한 옛날이라 들었는데 유독 교회 선거판에서는 여전히 부정과 음모가 득세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거룩한 감독회장과 감독을 뽑는데 돈 봉투가 살포되는 선거판에 무슨 신앙 양심이 작동하겠냐고 처절하게 지쳐가는 마당에 나온 이번 장로들의 선언문, 과연 선언문대로 변화가 가능할 수 있을까? 


좌우지간 평신도를 중심으로 그런 의로운 몸부림이 일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대교회에선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인위적인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도, 전도를 하는 일에도 전혀 성직자, 평신도의 구별은 없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때부터 평신도가 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공인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긍정적이지만 반대로 초대교회가 핍박을 무릎 쓰고 간직해 온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가 사라지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만 양산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부정론도 있다. 


그러니까 313년을 기점으로 성직자들에겐 많은 특혜가 주어지기 시작해서 그게 출세의 길로 여겨지다 보니 속으로는 호박씨를 까면서도 겉으로는 진짜 기독교인으로 행세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늘어났고 따라서 교회는 부패와 손잡기 시작했다는 해석이다.


그때부터 성직자와 평신도가 갈라지기 시작하여 아무리 크고 훌륭할 자라도 성직자 앞에서 평신도는 이름 없는 다수에 불과했다.


그게 얼마나 심했으면 평신도는 아예 성경도 읽지 못하게 했을까? 


그게 중세 암흑시대의 역사였다.


종교개혁 시대를 거쳐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탄생했다고 해서 평신도가 크게 달라졌는가?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교회역사 안에 어디 평신도 혁명이 일어난 적이 있는가?


 성직자가 덮자면 덮고, 목사가 기도하자면 기도하고, 내려놓으라면 내려놓고 그렇게 살아온 평신도의 대표가 장로들이다. 


물론 교단에 따라서 목사도 장로 목사, 집사 목사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장로하면 평신도 장로를 말함이다.


장로 중에 더러는 ‘목사 킬러’로 소문난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 교회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드는 고약한 장로 때문에 죽어도 부임 안한다고 버티는 목사들도 있다. 


자기 멋대로 목사를 내쫓고, 목사 월급 가지고 장난치고 때로는 목사와 야합해서 예배당 사고 팔 때 떡고물을 챙기는 장로들도 있기는 하다. 


그런 장로들이 세속사회에서 무슨 감투를 쓰고 리더십이랍시고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꼴을 보고 있으면 “저들의 행태 때문에 한인교회 전도의 문이 막히고 있구나”라고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수준이하의 장로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나는 믿는다. 


대부분은 목사님을 잘 받들고 충성하는 분들이다. 그런 장로님들의 순종과 헌신이 오늘의 이민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대들보가 되고 있다. 


힘겹게 비즈니스로 돈 벌어서 꼬박꼬박 십일조 바치고 교회나 목사님을 생각해서 가족 휴가 한번 찾아 먹지 못하고 그냥 묵묵히 일 년 열 두달 교회를 지키는 장로님들을 보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기도 한다.


그런 장로들이 드디어 목사들의 감투싸움, 돈 선거, 부정 선거에 진저리를치며 들고 일어섰다면 이건 거룩한 혁명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루터가 비텐베르크 만인성자교회에 붙였던 95개조 반박문에 해당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목사의 감투욕과 명예욕 때문에 교단이 거덜나고 한국 기독교가 침몰하고 있는 마당에 평신도라도 정신 차려 구명줄을 찾아 나선 것은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탓이다.


시스티나 성당에서 시행되는 교황선거 ‘콘클라베’처럼 우선 교단장, 연합기관 대표회장 선거에서 돈봉투를 없애므로 그 거룩성을 회복시키는 일만 성사시켜도 평신도 혁명이란 말이 아깝지 않다. 

탐욕에 사로잡힌 정치 목사 앞에서 여전히 ‘어린양’으로 무릎 꿇는 장로라면 그건 불의와 야합하는 평신도에 불과하다. 


시대는 깨어있는 평신도를 부르고 있다. 


기독교는 ‘광야의 소리’를 외치는 예언자적 평신도를 찾고 있다.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뱅, 얀 후스같은 성직자들이 불을 붙였으니 오늘날의 교회개혁은 성직자가 아니 평신도 대표인 장로들이 들고 일어나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돈 봉투 학수고대하며 선거철을 기다리고 있는 정치장로란 가라지들도 있으니 그걸 먼저 박멸하지 않고 평신도 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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