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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0년 전 시골 초가집에 살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 안방에는 2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하나는 예수님 사진이고 또 하나는 밀레의 ‘만종’이었다. 


지금생각하면 칼라카피 수준의 그림을 담고 있던 사진각구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추억속의 그 만종이 자꾸 그리워질 때가 많다.


밭에서 일하고 들어오신 후 마루에 밥상을 차려 놓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감사기도를 하시던 어머니가 그 만종속의 여인과 비슷하다고 느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안방에 걸려있던 그 만종이란 그림에 새 제목을 붙인다면 아마도 ‘노동과 감사’가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지난 9월 5일은 미국의 공휴일인 노동절(Labor Day)이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는 5월 1일을 메이데이(May Day), 혹은 워커스데이(Workers'' Day)로 지킨다.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를 향상하고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가톨릭교회에서도 비슷한 날이 있다. 


나사렛의 성 요셉기념일이 5월 1일이다. 성 요셉은 노동자의 수호성인이다.


기독교에서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실 때 6일간의 창조노동을 마치시고 7일째 안식을 취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일하시매 나도 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더구나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극단적인 말씀까지 하신 게 예수님이시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직업소명설’을 주창하기도 했다.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세속적 직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신앙의 싸움터’라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직업에 따라 노동에 임하지만 사실 노동의 의미에 관해 완벽하게 서술한 역사가는 아직 없다고 한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 말한다면 노동이란 그냥 일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마지못해 끌려 다니는 노동은 고통일 것이고 노동을 통해 의미와 즐거움을 찾게 되면 그건 축복이 될 것이다. 


자꾸 굴러 내리는 돌을 다시 산 정상에 끌어 올리는 시지푸스의 노동은 고통이지만 지난주 성인반열에 오른 마더 테레사가 빈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한 노동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교회당 건축현장의 똑같은 벽돌공이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다고 생각하면 축복이고 목에 풀칠하기 위해 이 짓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노동은 저주에 가까운 것이다.


노동절 연휴를 지나면서 밀레의 만종이 자꾸 생각나고 어디 감사할 구석이 없어 보이던 가난뱅이 노동자 우리 어머니가 마루에 앉기만 하면 머리 숙여 감사기도를 드리던 모습이 자꾸 떠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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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 마음 어딘가에 자꾸 찔리고 있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가기 위해 노동치는 일은 그런대로 숙달이 되어 가는데 감사하는 일에는 자꾸 구두쇠가 되어가고 있다는 제법 성숙한 마음의 찔림, 그것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무슨 직업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던 내가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요, 선택이다. 


우리는 너무 내 노동에 열중하고 때로는 지쳐있다 보니 그걸 잊고 살아간다.


육군 36사단 사단사령부에서 함께 근무했던 군대 후배 하나가 LA에서 코스메틱 도매업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나의 ‘핼로’ 문자에 그가 카톡을 보내왔다. 


“목사님, 전 오늘도 할일이 많아 회사에 나와 일하고 있어요. 하늘이 평생에 한번 준 기회 열심히 하려고요!”


하늘이 평생에 한번 준 기회인 그 일터에서 그는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있었다.


60이 훨씬 넘은 그 후배의 말에 나도 용수철 같은 힘이 솟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자리, 이 노동의 현장에서 평생에 한번이란 생각으로 열심을 내 보자!

더구나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3D(difficulty, dangerous, dirty)직업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메마른 농촌의 노동현장에서도 감사를 잊지 않으셨던 어머니, 농사거리라고는 겨우 감자나 심고 거두는 가난했던 프랑스 바르비종 들판의 밀레의 사람들처럼 머리 숙여 감사하는 일에 속임수를 쓰거나 구두쇠가 되지 말자. 


지금 일터에 있는가? 


그럼 감사하자.


<크리스찬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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