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하는 기대가 무색하게 20일도 안 남은 총선 정국의 모습은 혼란 그 자체다. 

주권자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인데 이 판에서 국민은 가장 하찮은 존재로 취급된다. 

선거구 획정은 법정기일을 넘기고 여야 권력자의 측근을 후보로 세우기 위한 은근한 술수가 난무한다.

얼핏 보면 국민 눈높이를 존중하는 듯하지만 오래된 사안이고 상황 변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선거용 눈속임이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공천 과정의 협잡도 선거철에만 여론에 민감한 태도도 모두 국민을 '개돼지'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런 후진 정치는 일차적으로 정치인의 저열한 자질 때문이지만 그런 행태의 반복을 방관한 시민의 책임도 없지 않다. 

그중에서도 국회의원이 가진 실질적인 권력을 직시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다.

입법부는 국민이 낸 세금의 쓰임새를 결정하고, 법의 제정을 통해 신기술, 금융, 언론, 환경, 교육, 문화, 노동 등 모든 분야가 작동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흔히 국회의원의 숫자나 그들이 받는 세비를 비판하지만, 그 세비의 몇만 배 가치가 있는 사안에 대한 권한을 고려하면 사소한 문제다. 

그런 면에서 국회의원 숫자와 세비를 줄이겠다는 공약은 또 다른 눈속임에 가깝다. 

오히려 국회의원 수를 늘리더라도 권한을 분산하고, 그 권력의 남용을 철저히 감시할 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이 국회의원의 진짜 권력과 권한을 실감하지 못하면 그들의 역할에 대한 요구나 평가보다 막연한 이념 논쟁이 부각된다.

특정 인물이나 사안에 대한 호불호를 좌와 우의 거대 담론 속에 마구 섞어놓고 편을 가르는 것은 단순하고도 치명적이다. 

국회의원의 실질적 권한에 대한 숙고와 판단, 견제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같은 편'이라는 착각,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한다는 추상적인 이유로 나에게 실질적 피해를 줄 정치인을 선출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저질 정치인에게는 이런 정치적 양극화가 나쁘지 않다. 

복잡한 의정 활동 계획과 구체적인 미래 비전을 나누는 것보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이 아귀다툼 때문에 생기는 정치 무관심도 이들에겐 축복이다. 

어차피 권력이 그대로인데 시민의 감시가 없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렇게 정치가 혼탁해질수록 선거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 

선거는 시민을 무시하는 정치와 이념 갈등이 서로 꼬리를 무는 악순환을 악화시킬 수도 있고 종식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유권자를 직간접으로 무시하는 행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선거에서는 어차피 다 똑같다는 양비론에 빠지는 대신 차악이라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우리 지역과 국가 발전에 대한 구체적인 복안을 가진 사람과 상대편에 대한 비난이나 이념 투쟁에 몰두하는 자를 구별해야 한다.

유권자이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자처하는 기독인의 역할과 책임은 더 크다. 

나의 유익이나 주장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면 피상적인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현실을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기독 시민의 정치적 판단 기준은 후보나 정치인의 종교와 진영이 아니라 그의 행동과 약속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일치하는지에 있다. 

어떤 후보가 공평과 정의,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며 약하고 소외되고 억울한 자를 돌아보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더 잘 실현할 사람인지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 전파뿐 아니라 시민을 무시하는 무도한 정치가를 쫓아내고 정상적인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것을 통해서도 확장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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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철(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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