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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배 목사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통로 (상)

 

●죄인들을 찾아오신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는가?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우주의 창조자, 만왕의 왕을 뵙고 교제하며 그와 함께 살아가는 야다의 삶을 누리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그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장 13절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모두 죄인이다(롬3:9-12, 시143:2). 그렇다면 의인이 하나도 없는데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앞에 네 절, 곧 마태복음 9장 9-12절을 읽고 문맥을 통해 보면, 뜻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의인 행세를 하는 너희 바리새인 같은 죄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세리 같은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 곧 자기를 의인으로 착각하는 죄인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죄인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둘 중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두 부류의 차이는 회개이다.

이 두 부류의 차이는 회개로 드러난다. 바리새인처럼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죄인들은 회개를 할 줄 모른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회개를 하겠는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도 회개는커녕 오히려 자기 의를 드러내기를 좋아할 뿐이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누가복음 18장 9-12절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던 세리의 기도는 달랐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달리, 세리의 기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기도였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8장 13절

내 기도는 둘 중에 누구의 기도를 더 닮아있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통로는 회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셨다(눅15:1-2). 이런 예수님을 바라보며 시기하고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첫째 비유에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으로 착각하는 너희 아흔아홉을 버려두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한 사람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다(눅15:4). 세리 같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착각하며 사는 너희 바리새인 아흔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고 이어 말씀하셨다(눅15:7). 

이같이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 왜 그런가? 회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장 32절

회개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나는 간접 지식의 저주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의인으로 착각하며 형식적인 제사, 위선적인 기도에 머물지 말고, 세리처럼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그가 만나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편 17절

이처럼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는 통로이다. 

 

<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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