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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배 목사

 

6장. 스콜라 신학의 영향...상

 

●철학화된 신학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는 여호수아 세대처럼 하나님을 직접 아는 야다 세대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고,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의 강력한 권능을 맛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직접 지식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결국 하나님에 관하여만 아는 간접 지식의 포로가 되는데,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스콜라 신학(scholasticism)이다. 

이단들이 등장하면서 교부들(church fathers)에 의해 시작된, 교리와 신학이 세워져가는 과정까지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해오는 인간의 통로 곧 헬레니즘(Hellenism)을 교회가 끊어내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과오였다. 

주후 9세기부터 안셀무스,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도한 스콜라 신학은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는 명분하에, “성령”의 자리에 “이성”을 앉히고, 하나님의 통로인 “계시”를 밀어내고 인간의 통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도입함으로써, 교제(κοινωνiα)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직접 지식을 몰아내고 사고(reasoning)를 통해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간접 지식으로 교회를 점령해버렸다.

신학과 철학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철저히 신학을 철학화시켰다. 

사고를 통해 얻는 ‘오이다’ 간접 지식에 집중하며, 관계를 통해 얻는 ‘기노스코’ 직접 지식를 몰아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철저히 관념화되었다. 

성경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야다를 누리는 신자들은 신비주의자나 이단으로 처단을 당했다.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예수님은 교회가 장차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셨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요한복음 16장 2-3절

예를 들어 종교개혁 시기에만 해도 카톨릭 교회는 얀 후스(Jan Hus),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등 개혁자들을 불태워 죽이고, 종교재판을 통해 수많은 개혁 성도들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성 바톨로뮤 축제일에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서북부 피드몬테 등 유럽 각지에서 개혁 신자들을 수천 명씩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확신하며, 학살을 자축하는 의미로 기념주화를 만들기도 하고 기념벽화도 그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상상하기도 어려운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답을 요한복음 16장 2-3절 예수님의 예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가 바로 기노스코이다. 

카톨릭 사제들과 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오이다 간접 지식만 있었을 뿐,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요16:3).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참혹한 일을 자행하면서도 그들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카톨릭 사제들과 교도들을 이렇게 추악한 괴물로 만드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 바로 스콜라 신학이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골2:8)는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헬라 철학을 통해 교회에 끌어들인 간접 지식이 마침내 저주가 되어 직접 지식을 몰아내고 이런 일을 저지르게 만든 것이다.

 

●그대로 답습하는 신학교들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5백여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오늘날도 개신교 신학교들은 스콜라 신학이 물려준 철학화된 신학을 그대로 답습하여 가르치고 있다. 

현실을 보라. 현재 신학교수들이 성경이나 신학을 가르칠 때 학생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며 야다를 누리게 하는가? 

아니면 사고(reasoning)를 통해 듣고 배우는 간접 지식을 전달하는가? 

교수들이 삼위일체론을 가르치며 하나님에 관한 간접 지식만 가르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철학화된 신학으로 전해지는 간접 지식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 교제함으로 얻는 직접 지식을 거부하게 만드는 저주가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목회 현장에서 깨달은 사실, 곧 내가 그토록 열심히 배웠던 신학이 목회의 현장에서 죽은 영혼들을 살리거나 양육하는데 쓸모가 없었던 이유이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오히려 신학을 배운 목사나 신학교수들보다 신앙이 더 좋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신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저주에 더욱 깊이 빠져드는 이유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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