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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배 목사

5장. 간접 지식이란? ... 

 

 

●링컨을 아는가?

 

여러분에게 “아브라함 링컨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안다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아브라함 링컨이 흑인 노예해방 선언자, 게티즈버그 연설자,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 16대 대통령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여러분은 링컨 대통령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링컨 대통령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나 책을 통해 전해들은 “간접 지식”이기 때문이다. 링컨을 아는 “직접 지식”은, 히브리어 야다의 뜻을 적용하면, 아내나 자녀, 친구, 동료들처럼 그 시대에 그와 함께 살며 직접 교제를 통해 링컨 대통령을 아는 것을 가리킨다. 링컨에 관하는 아는 “간접 지식”은 그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대부분 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의 통로, 곧 사람이나 책을 통해 전해들은 하나님에 관한 간접 지식만 있고 야다의 직접 지식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 지식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간접 지식만 갖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Knowing God)? 아니면 단지 하나님에 관하여 알고 있을 뿐인가(Knowing about God)?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

참고로 말하면, 주전(BC) 3세기경에 유대인 성경학자들이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옮겼는데, 그 번역본을 칠십인역(Septuagint)이라고 부른다. 당시 그들은 히브리어 야다를 헬라어 기노스코로 옮겼다. 

왜냐하면 “알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중, 오이다는 생각을 통해 얻는 간접 지식을 뜻하는 반면, 기노스코는 관계를 통해 얻는 직접 지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알다”는 동사로 오이다가 아니라 기노스코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영생”은 간접 지식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교제하며 그들을 기노스코로 아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간접 지식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접 지식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간접 지식에 만족하지말고 히스기야처럼 기도하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는 이렇게 기도했다.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열왕기하 19장 15-19절.

앗수르 제국에 의해 정복된 여러 민족의 신들은 불에 던져졌다.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신들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하나님(왕하19:20, 28), 앗수르 군대를 심판하여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왕하19:35-37).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시편 94편 9-10절.

나는 살아있는가? 

그렇다. 나는 지금 살아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내 존재가 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가 없으면 나도 없지만, 내가 없어도 그는 계시다.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이 분명한데, 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죽은 신들을 섬기는 종교인들처럼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가? 

간접 지식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 

그가 만나주실 것이다.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어 구하라. 응답해주실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야다 직접 지식으로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장 12-13절.

하나님의 초청을 왜 거절하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며 그를 직접 알아가는 이 엄청난 특권과 기쁨을 왜, 도대체 왜 포기하는가? 

사사 시대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처럼, 왜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간접 지식에 만족하며 저주의 길을 걸어가는가?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콜라 신학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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