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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교회 손경일 담임목사

 

아침에 일어났더니 휴대폰에 한 영상이 와 있었습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귀여운 아기가 뒤뚱거리며 걷는 영상이었습니다. 같이 있던 부모는 환호를 지르며 기뻐하며 큰 소리를 외칩니다. “와, 걸었다!”

아기는 태어나면 처음에는 누워만 있습니다. 자라면서 뒤척거리기 시작하고 점점 기어다니다가 아기는 이제 물건이나 벽을 붙잡고 서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혼자 서는 것이 익숙해지면 드디어 걸음을 떼기 시작합니다. 제게 영상을 보내준 형제는 아이가 이제 막 첫걸음을 떼는 장면을 녹화해 그 기쁨을 저에게 나눈 것입니다. 아마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시작된 걸음은 이제 아이가 자라며 점점 당연한 걸음으로 바뀝니다. 누구도 그 후에 “우리 아이가 걷고 있어요!” 를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자랑하면 오히려 이상해집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걷게 되는 과정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이제 걸음은 사람에게 있어 당연한 것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누구도 사람의 걸음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걷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걸음을 기념하기 위해 자랑스럽게 표시까지 해 놓은 곳들이 있습니다. 그리스에 네압볼리라는 도시의 오래 전 항구 앞에 가면, 바울이 유럽 선교의 첫걸음을 내디딘 곳이라는 표시와 함께 큰 돌이 놓여 있습니다. 심지어 이를 기념하는 교회까지 서 있습니다. 그 곳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의 터키 안디옥에 가면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쿠르트스라는 길이 있습니다.그 곳에서도 바울의 걸음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 길이 안디옥에서 열방으로 복음을 들고 바울이 걸은 길이라고 합니다. 로마에 가면 아피아가도라는 길이 있는데 이것은 로마 최초의 고속도로입니다. 그런데 이 도로에도 바울의 발걸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은 죄인으로 잡혀 이탈리아 보디올 항구에 도착한 후 이 길을 걸어서 로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죄인이었슴에도 그를 잡와 왔던 사람들의 발걸음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데, 오히려 죄인이었던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다 큰 사람의 걸음이 대체 무엇이 그렇게 특별해서 그 발걸음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바로 그 걸음이 복음의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려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바울 자신도 자신을 버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알리는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발걸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더러는 세상을 정복한 왕들의 발걸음도 있었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같은 부자들의 발걸음도 있었습니다. 성경 안에도 많은 발걸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내려놓고 따라갔던 발걸음도 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내가 꿈꿔왔던 메시야가 아니라고 예수님을 따라 왔던 발걸음으로 돌이켜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유다의 발걸음도 있었습니다. 또한 부자 청년처럼 예수님을 찾와 왔던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돈으로 돌아갔던 발걸음도 있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무엇을 위하던, 무엇을 향해 나아가던 매일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 발걸음은 언젠가 주님 앞에서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나의 인생이 무엇을 위해 어느 방향으로 걸어온 걸음이었는지의 주님 앞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을 옮깁니다. 오늘 내가 걷는 이 걸음은 주님이 어떻게 보시는 발걸음 일까요?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사야 52장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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