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은 세계 노인학대 인식의 날(World Elder Abuse Awareness Day)이다. 

UN과 세계노인학대방지망(INPEA)이 노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고 노인학대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6년부터 매년 6월 15일에 시행해 왔다고 한다.

 나도 이런 날이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금년에나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노인으로 늙어가고 있다 보니 노인이란 말만 나오면 정신차려 들여다 보다가 그런 날이 있는 줄도 알았다.

인생은 어린이 날로 시작해서 결혼기념일을 만나게 되고 그러다가 무심코 어머니 날, 아버지날을 맞이하나 했더니 어느덧 노인이 되는 일생의 수평 그래프를 그리게 된다. 한국에선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지킨다. 

미국은 8월 21일을 전국 노인의 날(National Senior Citizens Day)로 정해 놓았다. 또 조부모의 날이 있기도 하다. 

그런 노인의 날을 정작 노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지나간다면 다 그림의 떡이다. 사실 사회적인 분위기는 노인의 날이고 뭐고 그냥 조용히 코 박고 살다가 소리 없이 무대 뒤로 퇴장하는 것이 노인의 건강한 덕목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결국 노인이 되면 여기저기서 천덕꾸러기다.

아동학대하면 세상이 두 쪽 난 것처럼 들고 일어나서 야단법석을 떤다. 

그건 당연하다고 치자. 그럼 노인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면 야단법석을 떨 일은 아닌가? 그럴 경우 “늙으면 죽어야지. . ” 그런 식으로 쉽게 지나쳐버린다. 억울하다.

아니 억울하다 못해 원통하다. 미국에 이민 와서 되는 영어, 안되는 영어 때문에 체면과 스타일 구기면서 고생고생하며 아이들을 키워냈다. 

그런데 늙어서 자식들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기막힐 노릇 아닌가?

노인학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신체적 학대도 있고 정서적 학대도 있다. 

성적학대, 경제적 학대도 있지만 그냥 “알아서 사시라”라며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는 방임, 노인을 내다버리는 유기는 더욱 심각한 학대요, 범죄다.

한국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노인학대가 이루어지는 절대다수는 가정(88%)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학대를 가하는 행위자는 배우자(29%), 아들(27%) 순으로 조사되었다. 그런데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노인학대 가해자가 배우자이거나 자식이다보니 피해자는 가족인데 어쩔 수 없다며 쉬쉬 숨기고 산다.

약과 비타민이 초고속으로 발달되고 유익한 건강정보가 유튜브와 카톡에 넘치다보니 오래 사는 노인인구는 팽창하고 있는 중이다. 

한인교회 현실을 봐도 그렇다.

대부분 한인교회들에게 지난 수십년 젊은 목사 우선주위가 열풍처럼 불어댔다. 

나이든 목사는 빨리 꺼지시고 그냥 40대, 50대 담임목사를 모셔오면 교회가 금방 40~50대 젊은이들로 꽉꽉 들이차서 교회부흥은 식은 죽 먹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기대와 희망은 어떤 현실을 초래했는가? 

젊은 담임목사만 모셔오면 교회가 젊어지고 신입교우 환영회는 젊은이들로 그득할 것이란 계산은 대단한 오산이었다. 

결과적으로 담임목사만 젊어지고 교회는 점점 노인들만 모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공동체’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가정과 교회밖에 모르던 노인들이 어느 날 거동이 불편하여 주저앉게 되면 자식들 눈치도 살펴야 하고 그래서 양로원으로 옮겨가는 선택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거기는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나오는 음식도 빵에다가 풀떼기 뿐이다. 

한국 연속극이라도 간간히 보고 싶건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인간취급은 고사하고 그냥 짐짝 취급을 당하다가 외롭게 양로원에서 숨을 거둔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치솟는다. 대부분 이민교회 성도들이 가는 마지막 길이 그렇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웰페어 십일조까지 챙기면서 섬겨 왔건만, 그래서 교회 출석할 때는 그런대로 권사님, 장로님, 존경을 받고 살아왔는데 양로원 신세를 지다보면 순식간에 그런 인간존엄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 노인들이 회중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인교회는 주일학교 학생이 없다고 그냥 맥없이 뒷짐 쥐고 있을 시간에 당장 노인들의 복지와 그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노인중심의 목회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노인들의 복지를 위하여 노인학대문제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책무가 있다.

교회에서 매 맞는 주일학생을 목격하고도 관련된 상담 및 사법시스템에 고발하지 않으면 목사도 경찰서에 끌려가는 게 미국이다. 

나도 목회할 때 당한 일이다. 그렇다면 노인학대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노인복지사를 고용하거나 태스크 포스팀을 꾸려서 예방과 상담을 병행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양로원에서 당하는 노인 학대는 접근성에 어려움이 있어 당하고도 호소할 데가 없고 노출되기도 어렵다. 

혹시라도 담임 목사나 성도들의 정기적인 심방은 하나의 예방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인들에게도 인권이 있고 존엄하게 늙어갈 권리가 있다.

 노인에게도 행복추구권이 있다. 그런 노인에게 가정은 사랑과 존경 가운데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학대란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학대까지 당하고 산다면 그게 지옥이 아니고 뭔가? 

노인을 학대한다면 그건 백날 교회 다녀도 지옥 불에 빠질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레위기 말씀(19장32절)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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