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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는 1970년대였다.


그 시대에 운동권이 아닌 학생이 별로 없었다.


‘긴급조치’로 시대는 어둡고 신학교는 맘에 안들고, 그래서 출석만 부르고 유유히 강의실을 빠져나와 그림을 그리러 산천을 떠돌던 때가 내게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그림을 조금 더 잘 그리는 재주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의 어린 시절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면서 까뮈와 헬만 헤세에 심취되어 있던 그 시절, 마치 꿈을 포기한 청년처럼 허무주의에 빠져 방황하던 때였다.


 신학교에는 일주일에 한번 씩 전교생 예배가 있었다.


의무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 채플시간에도 나는 거의 들어가질 않았다.


무슨 교만 마귀가 가득 차 있었길래 교수들도 하나같이 맘에 드는 구석이 없었고 동기생들도 따분하게만 보였다.


신학교 2학년 때 내가 쓴 시와 그림을 가지고 개인 시화전을 명동에서 열었다.


사실은 시건방 수준이었다.


문단에 얼굴을 내민 적도 없고 제대로 그림을 그리는 수준도 아닌데 신학생 주제에 무슨 시화전?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시대를 향해 말하고 싶은 터질 것 같은 마음속의 함성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정작 중앙정보부에 문제의 전시회로 찍혀서 일주일 예정을 채우지 못하고 4일만에 작품을 모두 내려야 했던 아픈 추억이 있다.


작품을 내리는 날 전시장을 찾아오신 그 교수님이 내 작품 하나를 사시겠다고 했다.


물론 작품성이 아니라 기죽지 말라는 그분의 격려의 메시지인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얼마 후 교수님이 날 집으로 초대하셨다.


신학교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나 뿐 아니라 그 교수님은 웬만한 제자들을 집으로 불러 라면과 기숙사 ‘짠밥’으로 늘 먹을 것을 구하는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교수님 집에 갔더니 전시회에서 사주신 내 시화 작품을 응접실 벽에 걸어두고 계신게 아닌가?


그날 저녁은 정말 감동이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 온 것을 그날 처음 후회하지 않았다.


나를 인정해 주시는 교수님, 그리고 하잘 것 없는 제자의 작품을 응접실에 걸어두고 계신 교수님을 통해 비로소 나는 희망과 용기의 산소 호흡기를 제공받은 기분이었다.


차풍로 목사님이 바로 그 분이셨다.


뉴욕에 사시던 그 차 목사님이 이번 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군대에 입대하고 복학하여 졸업한 뒤 사회에 언론인으로 첫 발을 내딛으면서 교수님과 헤어지게 되었다.


1980년대 초 내가 미국에 와서 정착하여 사는 동안 목사님도 뉴욕에 정착하셨고 연합감리교 선교감리사를 지내시는 등 목회 하시다 은퇴하셨다.


은퇴하시면서 중풍을 만나 몸이 부분적인 마비를 일으켜 사모님께서 지극 정성 보살피심으로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셨다는 말만 들었다.


매년 우리 신문 구독료를 보내주시며 신문 잘 만들고 있다는 칭찬 전화를 해 주시곤 하던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시다니...


차 목사님은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하셨는데 특별히 인간관계를 연구하셔서 그랬는지 제자들에겐 늘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신학교 외톨이를 불러 학교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신 교수님, 배고프고 어려운 제자들을 불러 어떻게든 장학금이라도 받도록 백방으로 노력해 주신 교수님, 버르장머리 없는 제자들에게도 늘 한결같이 웃어주시던 교수님, 학문보다 사랑이 먼저임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신 교수님, 꿈이 않보이는 제자들에게 함께 꿈을 꾸자고 손을 잡아주시던 교수님, 그런 차 목사님은 사실 나에게만 그렇게 자상하고 인자하신 분이 아니었다.


모든 제자들에게 그랬다.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모두 스승인가?


교수 중에도 지식 기술자로 느껴지는 사람도 많고 가슴은 없고 머리만 굴리는 기계적인 스승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학문의 왕자’라고 불리는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에도 정치 교수, 해바라기 교수, 총장하려고 눈치 보는 교수, 돈에 걸신 들린 교수, 베끼는 교수, 성희롱하는 교수 등등 수준미달도 가지가지다.
가끔 LA에서도 서울에 사시는 담임선생님이나 교수님들을 초청하여 동창회를 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아름답고 부러운 모습이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분간이 안될만큼 다 같이 늙어가는 마당이지만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 아니던가?


그런데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스승들이 이제는 좀처럼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는데 우리들의 슬픔이 있다.


내달 5월 15일은 스승의 날, 이날엔 뉴욕의 차 목사님 사모님께 전화라도 해야 되겠다.


부모님과 더불어 우리의 나침반은 스승이거늘 존경하던 스승님들이 한분, 두 분 사라지고 나면 이 세상은 더욱 참혹하고 냉정한 이기주의만 남아 날 텐데. . .


벌써 그리워지는 차 목사님, 주님의 나라에서도 그 인자한 미소는 영원하소서.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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