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JPG



난 요즘 골프에 빠져있다. 파3에서 잘 맞은 공이 그린위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 그 묘미를 무엇으로 표현할까? 


뒤땅을 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면서 시도한 칩샷이 도르르 굴러 홀컵에 빨려 들어갈 때는 또 얼마나 짜릿한가? 


포물선을 그리며 창공에 떴던 드라이브 샷이 나무 밑이나 벙커를 피해 정확하게 페어웨이 한 복판에 떨어졌을 때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더구나 골프장 패션에도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집안용 작업복이면 어때? 


그냥 아무렇게나 입고 나서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자에서 신발까지 신경을 쓴다. 


모자는 악어표 라코스테다. 위에 입는 골프 티셔츠는 나이키도 있고 루이 까스텔, 또 언더아모도 있다. 


바지와 혁대는 나이키다. 


바람 불 때 입으라고 아내가 선물로 사온 페블비치 골프장의 자켓도 있다. 


선글래스는 두 개나 된다. 


하나는 프라다, 또 하나는 마우이 짐이다.


골프실력으로 따지면 프로와는 하늘과 땅 사이지만 골프복으로만 따지면 그런대로 프로수준이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옷들이다. 


비록 명품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알아주는 브랜드임에는 틀림없다.


내 평생에 옷을 사면서 명품이나 브랜드를 따져 옷 사본적은 없다.


 그럴 주제가 못됐다. 


개척교회 시절 내 월급은 딸랑 천불. 


그러니 브랜드 타령은 먼 나라 얘기였다. 


개척교회 사임하고 세월이 흘러 이젠 은퇴 날짜를 계산할 때가 되자 골프란 운동이 슬그머니 내게 접근해 왔다. 


그 골프에 빠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브랜드를 신경 쓰는 유치찬란한 속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신학교 선배이자 한때 성막전문가로 미국에서도 여기저기 세미나를 열고 다니던 강문호 목사님이 최근 이스라엘 수도원 기행문을 발표하고 계시다. 


이를 당당뉴스를 통해 읽었다. 


기행문을 읽으면서 내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수도원 영성에 매료된 강 목사님은 은퇴 5년을 앞두고 한국에 ‘봉쇄 수도원’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이스라엘에 있는 300여개의 수도원 가운데 몇 개 수도원을 집중 탐방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예수님 무덤위에 세워진 성묘 수도원에서 유일한 한국인 수도사 데오빌로, 한국이름 김상원 신부를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했다. 


강 목사님이 그 김 신부님에게 “정말 어려운 부탁인 데 헌 수도복이라도 좋으니 한 벌 얻을 수 없을까요?”라고 청했다. 그랬더니 그 데오빌로 수도사의 대답은 이랬다.


“절대로 안 됩니다. 수도복은 그렇게 가볍게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종신 수도사로 서원할 때 수도복을 받습니다. 한 벌입니다. 평상복입니다. 그리고 예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수의입니다. 

죽으면 이 수도복을 입은 그대로 매장하는 옷입니다. 딱 한 벌 가지고 평생을 삽니다. 

만일 파계하게 되면 도로 반납하고 수도원을 나가야 합니다. 

불교 수도승들도 수도복과 자기 밥그릇 딱 하나가 총재산입니다.”


수도복 딱 한 벌을 가지고 평생을 산다는 말이 내 머리를 망치로 때린 것이다.


성 조오지 수도원에서 강 목사님이 만난 이명길 수도사가 한말도 마찬가지였다.


“두 가지가 완성되면 수도의 완성입니다. 하나는 내 속에 음욕이 사라지면 수도의 완성입니다. 

또 하나는 내 눈에서 한 시간에 한번 씩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여 주신 십자가 감격의 눈물이 흐르면 수도의 완성입니다.”


기행문을 읽다 말고 반성문이 떠올랐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였는가? 


한 시간에 한번 씩 눈물이 나와야 한다고? 

그리고 음욕이 사라지면 수도의 완성이라고? 


아아! 난 수도사가 되기는 영 글렀다. 


눈물 흘릴 시간에 골프장에서 핸디캡과 싸우고 있는 내 꼬라지가 수도사와 어울리기나 하는가?

그래도 강문호 목사님이 한국에 짓고 싶어 하는 그 봉쇄 수도원이 왜 자꾸 마음에 끌릴까? 


세상인연 다 끊어 버리고 종신 수도사로 들어가서 노동과 찬양으로 하루종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어느 날 조용히 그 분의 부르심을 받는다? 


정말 성욕, 식욕, 잠욕, 소유욕, 명예욕 그리고 안전욕을 모두 초월하여 강요된 침묵 속에서 남은 생애를 살아야 하는 종신 수도사의 길만이 꼭 아름다운 삶일까?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내가 무수한 사람들과 비비고 복작대며 잡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갈지라도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해 바둥대는 하루하루가 사실은 수도사의 삶이 아닌가? 


그 생각에 이르니 심난한 마음의 교통정리가 되었다. 


직업 수도사의 길보다 그게 더 거룩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수도복 한 벌로 평생을 산다는 말에 입고 있던 나이키 골프복이 갑자기 죄송하고 부끄럽게 느껴지는 나에게도 어쩌면 한 가닥 수도원 영성은 살아 있는겐가?


<크리스찬위클리 발행인>

기획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