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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수 목사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


지난 부활주일은 교회마다 부활의 감격과 은혜가 가득하였으리라 믿는다. 
아직도 부활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 있는 포스트 부활 주간이다. 

나는 성경 본문 중 가장 좋아하는 본문이 요한복음 21장이다.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웬지 마음이 편안해 지고 따뜻해진다.

나는 이 본문을 사랑한다. 

이 본문을 읽고 대할 때마다 마음에 찡하고 감동이 온다. 

제자들의 실패를 따뜻하게 품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터칭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 먹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손수 떡을 구우시고 생선도 구우셔서 실패한 제자
들을 먹이셨다.

 먹는 시간, 축복의 시간이다.

기독교 영성의 전통에서는 매일 식사를 하나의 작은 성례전으로 대한다.
먹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다. 

우리 한국 문화에서는 ‘ 식사 한번 같이 합시다’ 라는 인사말을 자주 건넨다. 
식사를 같이 하자 라는 말은 단순한 사교적 초청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교제하며 깊은 마음의 교류를 나누자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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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식사는 사실 성만찬에서 유래된다. 

내가 사는 이 남부 바이블 벨트 지역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손을 잡고 기도하는 모습을 가정에서 식당에서 자주 목격하게 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식탁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

오늘 본문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에이프런을 두르시고 물고기를 굽고 빵을 가져다가 제자들을 대접하는 호스트가 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실패한 제자들을 따뜻하게 초청하고 계신다. 

갈릴리 바다에 친히 찾아오신 주님, 그리고 생업의 현장에 지친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따뜻한 조반을 차려놓으신 주님, 그리고 친히 생선을 잡고 식단을 마련하신 주님,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따뜻한 주님의 모습과 채취가 느껴진다. 

우리는 부활하면 너무 내세를 생각한다. 

과학의 시대에 부활하면 황당하게 받아 들이는 사람들도 많다. 

현대인들은 농담을 하다가도 부활이라면 질겁을 한다. 

왕따의 정서이다. 

부활이란 우리가 죽고 장사 지낸 후에 일어나는 요원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삶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로 치부한다. 

그러나 본문의 부활 주님은 살아 있는 자들의 일상의 삶의 현장에 성큼 다가오시는 주님이시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지금 천당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일상의 현장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 있다. 

그들의 익숙했던 생업의 현장에 서 있다. 

부활의 예수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계신다. 

그렇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주님이시다. 
부활의 주님을 너무 초현실적이며 이상향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삶과는 상관 없는 그런 초자연적인 삶으로 받아 들이지 말자.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일상의 삶에 찾아오시면 우리의 사역이 변화한다. 

우리의 가정이 변화한다. 

우리의 삶에 병마가 떠나가고 회복이 이루어 진다. 

아픈 분들이 치유를 받고 못된 인생의 습관의 중독이 된 분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자유함을 누린다. 

그것이 부활의 주님이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 우리가 가장 좌절과 슬픔에 빠진 낙담의 현장에 찾아오신다. 

우리가 한숨 짓고 눈물 짓는 사역의 실패 현장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로 하신다. 

나도 몇 차례 목회를 접고 싶은 고난의 시간에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나의 손을 붙들어 다시 재기하게 하셨다! 

부활의 은혜가 거친 인생의 여정 길, 목회의 사역 길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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